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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1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5-11 조회수 : 2979

우리가 성령을 받았는지 지적으로 확인하는 법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께 올라가시는 이유가 ‘성령’(보호자)을 내려주시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가 ‘죄와 의로움, 그리고 심판’에 관한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을 받아 죄와 의로움, 그리고 심판에 관한 올바른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만약 그러면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무엇입니까?”

만약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죄라고 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님 앞에 서려면 무엇을 보속해야 합니까?”

보속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고 여기면 이또한 문제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 잎으로 자신들을 정당화하려고 했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의 죄의 탓은 진정 누구에게 있는 것입니까?”

뱀이나 자기 자신, 혹은 아담처럼 하와에게 있다고 심판한다면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상상해보면 쉽습니다.

한 아이가 할머니 댁에 여동생과 놀러 갔다가 그만 새총으로 할머니가 아끼는 오리를 죽이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할머니 몰래 죽은 오리를 장작더미 속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여동생이 이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여동생은 자신이 설거지해야 하는데도 오빠에게 “오리를 기억해!”라고 하며 오빠를 부려먹었습니다. 오빠는 여동생 입을 막기 위해 여동생 몫의 심부름을 자신이 도맡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며칠 뒤 너무 힘이 들어 손자는 할머니에게 사실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다 알고 있었단다. 다만 네가 언제까지 동생의 노예 생활을 하는지 지켜보고 있었단다.”


자, 이제 아담과 하와에 관한 같은 질문을 다시 해 보겠습니다.

“아이의 죄는 무엇이었나요?”

오리를 죽인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할머니의 자비를 믿지 못한 것이 죄입니다. 할머니는 오리를 죽이기 전에 이미 손자를 용서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의 죄는 무엇이었을까요?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한 것이 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분이 세상에 우리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말은 이미 우리가 죄를 짓기 이전에 모두 용서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는 죄를 짓는 것 자체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아이는 죄를 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했나요?”

동생에게 노예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에게 가야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리는 일이 아니라 ‘가죽옷’을 받아 입음으로써 의롭게 되었습니다.

의로움은 나의 행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받는 것입니다. 가죽옷은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입니다.


우리는 우리 행위로 구원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구원됩니다. 마치 야곱이 에사우의 겉옷과 믿음으로 상속을 받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레베카가 이사악과의 사이에서 중개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가죽옷이 벗겨지기 위해 아버지께 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으로 

“그러면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요?”

여동생일까요? 아닙니다. 여동생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할머니에게 용서를 받을 때 이미 여동생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자기가 심판자가 되어 여동생을 심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 같은 죄인으로서 할머니의 자비가 필요할 뿐입니다.

아담도 하와를 심판해서는 안 되었고, 하와도 뱀을 심판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미 용서받음으로써 그것들에 대해서는 심판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성령을 통해 죄가 용서받은 사람은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심판받은 대상을 또 심판하며 자신의 죄를 합리화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어 마지막으로 주시는 열매는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처지’가 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 살인죄로 무기 징역형을 받고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국가에 커다란 공을 세운 사람이라 임금에게 가서 동생의 사면을 청했습니다. 자비로운 임금은 형에게 동생의 사면권을 써 주었습니다. 형은 그 사실을 숨기고 동생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너, 만약 지금 사면을 받아 자유가 된다면 무엇부터 하겠니?”


동생이 말했습니다.

“나를 감옥에 처넣은 재판관부터 죗값을 치르게 해야지!”


형은 슬픈 표정으로 동생이 갇혀있는 곳을 나오며 사면권을 찢어버렸습니다.

자, 동생의 죄는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살인한 것이 아니라, 형과 임금의 자비를 믿지 않은 것이 더 큰 죄입니다. 자비를 믿지 않음이 죄입니다.

그러면 동생은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을까요? 복역 기간을 다 채움으로써일까요? 아닙니다. 동생의 의로움은 형이 가져온 사면권에 있습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 노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피로써, 곧 성령으로 용서됩니다. 괜히 고해성사 때 죄가 용서받는 것을 그리스도의 핏값이 아닌 우리 보속에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동생이 재판관을 심판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요? 사면권을 받았다면 이미 재판관은 옳지 않은 재판을 한 것이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용서를 받았는데 또 누군가를 심판하고 있다는 말은 실제로는 용서를 받지 못했다는 뜻이 됩니다. 성령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죄가 용서받은 사람들은 이렇듯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하느님은 아담을 용서하시며 하와도 동시에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죄를 용서받은 아담이 계속 하와를 미워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담은 하느님보다 높은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누군가를 심판하고 미워하고 있다면 성령으로 죄가 용서되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아 죄가 여전히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심판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사면권인 성령을 거부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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