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속에 머물려면 만인 앞에 솔직해져라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빛은 성전 안에 있는 진리입니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빛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누구 곁에 머물거나 어떤 집에 들어가면 반드시 그 집의 규칙을 지켜야 하고 상대를 의식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옆에 머물며 할 수 없는 행동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물면 그분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서 우리는 그분 뜻대로 살게 됩니다.
현존이 곧 뜻이고 그리스도의 현존이 곧 빛입니다.
그러니 빛은 현존이고 계명입니다.
우리가 그분 계명 안에 머물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은 우리 안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게 해서 구원하시는 방식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과 대화함으로써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잊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잊지 않았다면 선악과를 따먹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현존을 잊음으로써 어둠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빛 안에 머물며 구원받으려면 항상 그분께서 함께 계심을 믿고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의 현존을 항상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이 한 이 말을 되새겨야 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다시 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기 이전에 눈에 보이는 사람들 먼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눈에 마음에 들기 위해 살기 이전에 사람들 눈에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살라는 말이 아니라 항상 사람들이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 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빛 속에 머물게 됩니다.
‘정직한 후보’(2020)는 ‘정치인이 거짓말을 못 하게 된다면 어떨까?’라는 상상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할머니의 죽음과 보험회사와의 싸움을 통해 국회의원이 된 주상숙은 4선 당선을 위해 국민에게 거짓말을 일삼으며 인기몰이를 합니다.
사람들 앞에 나설 때는 싸구려 옷을 입고 낡은 신발을 신고 허름한 아파트에 사는 척하지만 실은 어마어마한 저택에 삽니다.
하지만 주상숙에게는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모두가 죽은 줄 아는 주상숙의 할머니 김옥희입니다.
김옥희는 죽지 않고 살아있었지만 죽은 걸로 기록되어 있고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주상숙을 부른 김옥희는 제발 거짓말하지 말고 철들었으면 좋겠다며 돌탑을 쌓고 소원을 비는데
그날 이후로 주상숙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이상한 현상을 겪게 됩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던 주상숙은 공식 석상, 방송 프로그램에서 자기 의도와는 다르게 진실만 말해 고민에 빠집니다.
사실 줄거리보다는 솔직한 정치인의 생각이 담긴 대사가 더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시어머니가 찾아온다고 할 때 남편에게 “너희 집 얘기만 나오면 짜증이 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시사 프로그램에 나가서 야한 이야기를 하다가 사회자가 “시사 프로그램에서 이런 19금 토크를…. ”이라고 하니까,
“어차피 투표는 19금이니까.”라고 대답합니다.
그녀는 고백합니다.
“나 말이 내 맘처럼 안 나와. 말이 똥처럼 나와.”
그나마 솔직함으로 밀고 나가려는 유일한 희망을 찾아와서는 “늦에서… 죄송하진 않아요.”라고 인사합니다.
“나는 서민의 일꾼이다.”라고 말해보라는 보좌관에게
“야, 내가 서민의 일꾼은 아니잖아.”라고 합니다. 연설에서 이런 말들을 쏟아냅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사는 동네로… 만들 수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국민들이 똑똑해지면 저 같은 사람은 아주 골치 아파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는 정치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또 자신과 함께 비리를 저질러 온 사람들을 폭로하고는 자신도 2년 감옥살이까지 합니다.
이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한 일들입니다.
왜냐하면, 잠시라도 빛 속에서 살던 때고 좋았기 때문에 계속 솔직해지려 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어떤 정치인이 마이크가 꺼진 줄 알고 말을 잘못 해소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신부님이 무선 마이크를 차고 미사를 하는데 끝나고 제의방 화장실에 들어가서 볼일을 보는데
그 소리가 성당에 다 들렸다는 우스갯소리도 들었습니다.
그것이야 잘못은 아니지만, ‘항상 신자들이 다 보고 듣는 가운데 살아간다면 죄지을 일은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무화과 잎으로 가린다는 것은 외적인 것으로 덮어버린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솔직함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거짓된 속성을 뜯어버리시고 아드님의 정직함을 입혀주십니다.
그것이 가죽옷입니다.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들이 빛 속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분과 함께 있으면 숨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분의 계명 안에 머물고 싶거든 먼저 솔직해집시다.
가장 좋은 것은 만인 앞에서 할 수 없는 것은 안 하는 것이고, 만인이 들어도 괜찮은 말만 하는 것입니다.
생각까지 그럴 수 있다면 더 좋습니다.
혼자 있을 때도 만인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시다.
사실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은 수의 천상 백성이 지켜보고 있고 하느님도 보고 계십니다.
이것이 빛 안에 머무는 방법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