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이유: 집은 주인과 하나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고 재촉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분명히 그렇다고 말했는데 믿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믿지 않는 이유는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예수님은 ‘성전’으로 표상되고 있고 그 성전이 ‘양의 우리’로 상징됩니다.
성전 안에 있는 양들만이 성전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10장 전체를 훑어보려 합니다.
예수님은 처음엔 당신 자신을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하셨다가 그다음엔 ‘목자’, 이제는 ‘양 우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문’은 ‘길’과 같습니다.
그 길을 통하지 않으면 아버지께 갈 수 없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으로 갈 수 없습니다.
또 ‘목자’는 ‘진리’와 같습니다.
그분의 이끄심이 아니면 오류로 빠집니다.
이제는 양의 ‘우리’라고 말씀하시며, 마치 성전에 들어와 있는 이들은 성전 주인이신 하느님에 의해 ‘생명’을 보장받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느님께서 지켜주시는 집이기에 누구도 당신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이를 예수님은 이렇게 정리하십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제가 있는 곳은 죽산성지입니다. 죽산성지는 ‘이진터’로 불렸습니다.
고려 시대 때 몽골인들이 진을 쳤기 때문에 오랑캐들의 진터라고 불린 것입니다.
이전까지 고려는 몽고인들에게 전투에서 제대로 승리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여기 이진터만 빼놓고는 말입니다.
이곳에는 ‘죽주산성’을 지키고 있었던 송문주 장군이 있었습니다.
송문주 장군은 몽골인들과 전투를 벌인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공격해 올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성은 쉽게 함락되었지만, 송문주 장군이 지키는 성은 그래서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군사들은 어떻게 그렇게 그들의 전술을 다 알고 있느냐며 장군을 ‘신명(神明)’이라고 불렀고 15일간의 전투 끝에 몽골족은 대패하고 도망을 칩니다.
그 이후 승기를 잡은 고려인들은 원나라의 3번째 침략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성은 그 성을 지키는 이와 하나이고 그 안에 있는 이들은 그 지키는 이에 따라 생사가 갈립니다.
성전은 하느님께서 지키시는 성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참 성전인 그리스도의 품에 머문다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당신이 가장 강하신 하느님의 성이요, 성전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전 봉헌 축제’일이고 성전을 봉헌했던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있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누카라고 하는 이 축제는 이방인들에게 더럽혀졌던 성전을 마카베오가 다시 봉헌한 것에서 유래합니다.
이때 메노라, 즉 불을 밝히며 축제를 벌이는데 예수님은 이 시기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이시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오면 빛 안에 있는 것이고 예수님을 벗어나면 어둠이요 밤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아버지께 봉헌된 참된 성전이라 하시며 당신을 허물어도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봉헌된 참된 성전이고 그 안에 머무르는 이들은 아버지께서
하느님이시기에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어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우리도 참 성전이 됩니다. 하지만 성전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을까요?
빛 안에 머묾으로 증명됩니다. 빛은 죄에서 벗어나 그분의 계명 안에 머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 위해 요한복음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으로 자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의 성전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와 하나이고 그래서 하느님과 대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참 성전이 되었음은 내가 하느님과 하나 되고 곧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음으로써 증명됩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이것을 부정하고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합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십니다.
성서상으로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우리 자신을 하느님으로 여겨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하느님이라 믿는 것이 중요할까요? 그 이유는 그래야 하느님이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되려는 것은 어둠이고 죄입니다.
우리의 죄는 ‘하느님처럼 되려는 시도’에 의해 시작됩니다.
우리 자아인 뱀은 우리가 하느님의 것까지 우리의 것으로 여기고, 우리 스스로 창조자가 되어 육체적 쾌락을 즐기게 하고, 이웃을 심판하여 하느님이 되라고 유혹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자아를 섬겨서 하느님이 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죄에서 벗어나려면 이미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더는 돈에 대한 욕구나, 쾌락, 혹은 교만이 자신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기 때문에 더 가질 필요가 없고, 하느님이기 때문에 피를 흘려 창조사업에 동참할 수 있으며,
하느님인데 그처럼 살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누구도 심판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알려주시기 위해 끝까지 하느님과 대등하다고 주장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로 가야 하고, 예수님이 알려주신 진리를 믿어야,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누립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핵심입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성전으로서 하느님임을 믿고 여러분 안에 들어온 이들을 구원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모셨기에 우리도 하느님임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집과 주인은 하나입니다.
우리 각자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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