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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4-07 조회수 : 3295

구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약의 주제는 나의 십자가다


오늘 복음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내용입니다. 이들은 여인들의 증언을 들었음에도 믿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동행하시며 ‘성경’을 뜨겁게 설명해 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성경’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구약에서 어떤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바로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설명해 주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들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를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틀대로 국가를 재건해 줄 다윗과 같은 메시아 상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니 아담이 갈비뼈를 내어놓는 것이나, 아벨이 피를 흘려야 하는 이유나, 바위의 옆구리가 뚫려야 하는 것, 구리뱀이 장대에 들려야 하는 것 등의 내용이 메시아의 수난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는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성경을 가슴 뜨겁게 설명해 주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자신들 숙소에 초대합니다. 그리고는 그분이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알아봅니다. 이 덕분에 그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그리스도를 제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교회에 머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 머묾’은 신약성경의 주제입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을 파견하셨듯이, 당신은 교회를 파견하시며 교회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머물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낯선 예수님을 자신들의 집에 맞아들였기 때문에 그분을 알아보아 교회로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머무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이웃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이는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구약의 주제가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라고 한다면, 신약의 주제는 ‘그리스도를 위한 나의 죽음’입니다. 이 방향에서 벗어난 해석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점점 벗어나게 만듭니다.


영화 ‘미나리’(2021)에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어떤 점에 초점을 맞춰 읽어야 하는지 상징적인 내용이 있어 소개합니다.


미나리는 한 한국 가정이 미국에 정착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미나리가 어디에서나 잘 정착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이 가정은 아직 미국에 정착하기 어려워하며 큰 위기를 겪습니다. 이 힘든 상황에서 아내는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어머니를 미국으로 초청합니다.


아이들은 좀처럼 할머니를 할머니로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이들은 할머니를 가뜩이나 힘든 자신의 집에 민폐를 끼치는 사람 정도로만 인식합니다. 그래서 손자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오줌을 물이라고 속여 먹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가진 재산을 다 딸에게 주었고 아이들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문화적 차이로 할머니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막내 데이빗이 다쳤을 때는 잘 치료해주고 잠자기 무서울 때는 안아줍니다.


할머니가 병에 걸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 피와 같은 1년 농사를 태워 버렸을 때, 아이들은 도망치고 싶은 할머니를 떠나지 못하게 막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그리스도를 떠나지 못하게 막는 엠마오의 제자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영광보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아야 합니다. 사실 그렇게 보려 한다면 구약의 모든 내용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예언입니다. 모든 내용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신약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구약성경이 손자 데이빗의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보는 것이라면, 신약성경은 할머니의 처지에서 보아야 합니다. 할머니는 이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1년 농사를 다 태워버리는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할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함께 머물러야 할 가족의 반대 방향으로 걷습니다. 그 가족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라 머물 힘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손주들이 할머니의 앞을 가로막습니다. 한 가족에 머물 힘은 내가 그 가정을 위해 공헌한 것보다 ‘자비’에 있습니다. 물론 할머니가 먼저 그 가족에게 자비를 베풀었기에 가족도 할머니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할머니라는 것만으로도 그 가족에 머물 자격이 있습니다.


신약의 목적이 교회에 머물게 함인데 교회에 머물려면 내가 교회에 공헌한 것보다 바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자비 때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 줄 모를 때는 그 자비도 믿지 못합니다. 신약의 새로운 계약이란 이 자비의 계약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그리스도처럼 대할 수 있을 때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우리를 교회에 머물게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어떠한 시선으로 읽어야 하는지 일깨워줍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고 묵상해도 이 초점을 잃으면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유다인들처럼 구약에서 메시아의 수난을 찾아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에게 자신들의 오줌을 마시라고 가져다줄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용서가 있는 교회에 머물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할까요? 나의 능력이 아닌 하느님 자비에 맡겨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주지 않으셨으면 그 자비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이웃을 위해 그리스도처럼 빵이 되지 못할 때 새로운 계약상 그 사람은 진정으로 교회에 머물 힘을 잃게 됩니다. 성체 성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체 성혈은 나도 그런 사랑을 베풀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는 모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같습니다. 다시 그리스도 공동체에 진정으로 머물기 위해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찾아내려고 노력’해야 하고 ‘신약성경에서는 나도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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