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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2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3-26 조회수 : 3093

왜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위선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왜 유다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셔야 했는지,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임을 자처하고 있는 근거는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임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의 아들이다.”라고 하면 ‘인간임을 자처’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들도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요한 8,41)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이들의 차이는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이라는 믿음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고 유다인들은 자신들은 인간이란 믿음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늑대라는 믿음으로 사람을 아버지라 부르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처럼 두 발로 걸으려고 할까요? 아닙니다. 인간이라고 믿으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위선이요, 거짓이 됩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 신앙에서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당신은 하느님입니까, 사람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성당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저희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이 만약 “우리는 하느님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치 그리스도를 돌로 치려고 했던 것처럼 그런 사람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사람이라고 끝까지 믿으려는 이유는 사람으로 하는 일들을 관두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속 돈을 좋아하고 육체적이고 교만한 일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본성이 하느님이라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고 돈에 집착도 할 수 없어집니다. 그렇기에 위선적으로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자신은 인간이라 굳게 믿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려면 자신도 하느님이라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이선희 씨가 ‘힐링캠프’에 나와 어떻게 ‘J에게’란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지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이선희 씨는 친구들과 길을 걷다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선희야, 저쪽으로 가면 음악 사무실이 있더라. 혹시 알아? 저기 가면 음악을 할 수 있게 해 줄지?”

간판에 ‘장욱조 음악실’이라 적혀 있었습니다. 이선희 씨는 무턱대고 그곳에 들어갔습니다.

“왜 왔어?”

“노래하러 왔는데요?”

“한 번 불러봐.”

장욱조 씨는 이선희 씨의 노래를 듣더니 “노래 잘하는데? 여기 한 달에 00만 원이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선희 씨는 노래를 배울 생각이 없었습니다. 벌써 본인은 가수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양하고 나오는데, 그날 마침 어떤 무명의 작곡가가 “아, 진짜. 내가 온종일 돌았는데, 아무도 이 노래를 안 부르겠데.”라며 쓰레기통에 악보 한 다발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선희 씨는 “그럼, 제가 이거 불러도 돼요?”라고 물었습니다. 작곡가는 어차피 쓰레기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선희 씨는 뭔지 모르지만, 그냥 악보라는 것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이미 가수라 믿었기 때문에 모든 악보가 자신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안에 ‘J에게’란 곡이 있었고,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으며, 그 곡으로 대학 가요제에서 데뷔하게 된 것입니다.

 

이선희 씨는 언제부터 가수였던 것일까요? 만약 본인이 가수라고 여기지 않았다면 돈 내고 배우기 위해 학원을 전전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가수라고 여기지 않았다면 좋은 곡을 받아 가수가 되려고 하지 남이 버린 곡을 자신이 불러보겠다는 마음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유태인이 이 세상에서 그 많은 성과를 내는 것도 그렇고, 수많은 자수성가 한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있는 마음은 ‘믿음’입니다. 이미 되었다고 느끼는 사람이 나중에 되는 것입니다.

미국 초등학교 한 반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꿈을 써내라고 했습니다. 한 흑인 아이만 ‘대통령’이라고 써냈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고 있었습니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것은 그때부터였던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다 이뤄집니다.

 

어쩌면 우리 대부분은 믿으면 될까 두려워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고는 있지만, 자신이 ‘하느님’이라 고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 음료수와 술이 가득 찬 냉장고에서 소주를 찾다가, 누군가가 “저거 뭐야?”라고 물을 때, 그것을 가까이서 보고 “어, 이건 병이야!”라고 대답한다면 그게 정상일까요? 병인 것은 맞지만 그 안에 소주가 들어있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소주를 찾다가 술병을 보고 “여기 소주다!”라고 말하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두 본성이 합쳐져 있을 때 보통 그 겉을 싸고 있는 것보다 그 안의 물질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신문지에 쌓인 굴비를 보며 어머니가 “저게 무엇이냐?”라고 물을 때, 신문지라고 대답할 아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성체는 밀떡이 아니라 그리스도요, 하느님이라 고백하면서, 똑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데도 우리는 그냥 사람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요? 그 믿음 때문에 내가 진짜 그리스도처럼 변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은 모두 신입니다. 말씀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따라서 우리도 말씀을 받아들였으므로 내가 인간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보며 “나는 하느님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의 존재를 퇴색시키지 않습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인간이라고 믿어야 인간의 행위를 시작하는 것처럼, 내가 하느님이라 믿어야 사랑이 됩니다. 사랑은 행위가 아니라 본성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 믿을 때 숨을 쉬어도 그것이 사랑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믿고 하는 행위는 겉보기에는 사랑일 수 있어도 본질에서는 그저 인간의 덧없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자신을 하느님이라 고백할 용기가 없는 이들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사랑은 인간적이고 인간적인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만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이 하느님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 없이 나오는 모든 행위는 선행처럼 보일지라도 다 위선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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