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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1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3-18 조회수 : 3592

에덴동산엔 옷 입고 못 들어간다

 

오늘 복음에서는 믿으려는 마음이 없으면서도 그 핑계로 표징만 요구하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믿을 수 있는 증거가 얼마든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선 요한의 증언이 있었고, 당신이 하시는 일이 당신을 증언해주고, 또 아버지께서 직접 증언해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이 당신을 증언하는데도 그들은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은 그들이 ‘자기들의 영광만을 추구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꼬집으십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자기 영광을 추구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어떻게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과 반대되는 것일까요? ‘자기 영광’은 ‘자존심’과 같은 말입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억은 ‘내가 그것을 했다.’라고 말하나 내 자존심은 ‘내가 그것을 했을 리가 없다.’라고 맞서는데, 결국엔 기억이 자존심에 굴복한다.”


자존심은 자기가 옳다는 주장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은 그 자존심을 무너뜨립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한 부잣집에 시집 온 가난한 여인이 지나치게 사치를 부리고 다녔습니다. 이것은 자존심입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다른 사람들도 다 돈 좋아하는데, 뭐?’라는 마음으로 달랬습니다. 이렇게 자존심은 사실을 왜곡하게 만듭니다.


이때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어차피 우리 재산은 다 너희 재산이 될 거야. 너는 그렇게 꾸미지 않아도 이미 부자야.”

이것이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존심을 세우려 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이 영광을 받으면 나 자신을 굳이 포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이 영광은 바라지 않고 자존심만 세웠습니다. 자존심을 세우는 방식은 자기를 거짓으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가해 다른 이들도 자신과 똑같다고 여깁니다. 다른 이들도 자신처럼 거짓으로 포장하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도 없고 믿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이미 다 이해한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른 이들도 자신과 똑같아야 하기에 ‘역지사지’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다 아는데 역지사지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사는 것에 대해 매우 분개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군인으로 매우 철저한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의 앞길을 막을 정도로 심한 망나니였습니다.


참다못한 아버지는 유명한 정신과 의사에게 아들을 데려갔습니다. 의사는 일단 집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기 위해 역할극을 해 보자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하던 대로 아들을 자신처럼 철저한 모습으로 키우기를 강요하는 모습을 보였고, 아들은 처음엔 잘 해 보려고 했으나 아버지의 기대를 채우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자신이 술과 마약으로 망가지는 것으로 합리화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들이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던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의사는 아버지가 아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게 이번에는 역할을 바꿔서 해 보자고 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 주었으면 좋았을 따듯한 말들과 위로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아버지가 “나는 마약 중독자가 아니에요!”라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처지가 되어볼 필요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믿고 또 그렇게 혹시라도 자기 자존심에 금이 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그 사람을 이해하고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처지가 되어보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이해하고 믿게 됩니다.

위 아버지와 같은 상태까지 오게 만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의 처지대로 남을 판단하는 것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솔직해지는 것입니다. 남도 자기와 같을 것이라고 여기는 마음은 하나의 자기 합리화 방법입니다. 자기 합리화를 멈추면 자기 식대로 남을 평가하고 바라보는 습관도 멈춥니다. 아담이 자기 몸을 가리는 것을 하지 않았다면 굳이 하와를 심판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내 껍데기를 벗어야 상대의 진실도 보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레온 페스팅거는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는 존재일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합리화는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것이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행위입니다. 이 행위가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은 물론 하느님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고 믿지 못하게 합니다.


따라서 믿으려면 무엇보다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먼저 자신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하느님도 믿게 됩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하면 성경도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또 하느님도 그런 분이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린이들이 쉽게 믿는 이유는 그들에겐 거짓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하지 못하면 고해성사를 통해서라도 끊임없이 나의 치부를 드러냅시다. 껍데기를 벗어야 에덴동산에서 살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옷 입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 모습이 교회 공동체에서도 이뤄져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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