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받지 못하면 회개하지 못 한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왠지 ‘공동체’의 중요성에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공동체는 죄를 용서받는 장입니다.
그러나 규율이 지배하는 공동체에서는 죄의 용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르코는 이런 규율이 지배하는 대표적인 공동체를 ‘바리사이들’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들 안에서는 하늘 나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죄의 용서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 남의 집 땅에서 자라는 밀이삭을 훔쳐 먹었습니다.
율법 규율이 그 집단의 지배 원리인 바리사이 공동체는 이 일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율법을 어기는데도 그들을 옹호해 주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율법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에는 참다운 안식이 있는데, 그 이유는 모든 율법을 뛰어넘는 당신이 그 안에 머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그렇게 이루어진 안식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주인이십니다.
피아제와 콜버그는 사람은 성장하면서 도덕성도 발달한다고 말합니다.
도덕성의 발달은 규율로부터 얼마나 자유롭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래의 지문을 읽고 하인츠의 행동이 정당했는지 살펴봅시다.
“하인츠는 암에 걸려 죽어가는 아내를 살리는 데 필요한 약을 구하고자 합니다.
이때 한 약국의 약사가 아내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약을 발명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하인즈는 약을 사러 갔지만 약사는 제조비의 대가로 원료값의 10배인 한 알에 2000달러를 요구하였습니다.
하인츠는 모든 지인에게 찾아가 돈을 빌렸지만 1000달러밖에 구하지 못해 약사한테 사정을 해봐도
약사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인츠는 절망하고 죽어가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약국을 부수고 약을 훔쳤습니다.
이때 하인츠는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옳은가요?”
“그러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가장 낮은 단계입니다.
유아들은 옳고 그름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생존에 유익한 것이 옳은 것입니다.
만약 “그래도 법을 지켜야지요. 법은 지키라고 있는 거예요.”,
혹은 “돈을 안 내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잘못된 거죠.”라고 대답하면 어린이 정도의 도덕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부모에게 혼나기 싫어서 부모의 말에 복종합니다.
자율적 판단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은 무단 횡단하거나 신호등을 어기는 사람이 있다면 참지 못하고 신고합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의 모습입니다.
더 높은 단계는 법보다 상황과 사람을 더 중요시하는 단계입니다.
“법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법을 위해 있지 않기 때문에, 분명 벌을 받을 수 있을지언정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단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과 자비가 법을 넘어서는 단계입니다.
장발장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쳤습니다.
그런데 그 죄로 19년을 복역했습니다.
원리 원칙을 강조하는 자베르 경감은 장발장을 주시합니다.
장발장은 19년 동안 자신이 당연한 죗값을 받는다고 생각했을까요?
우리나라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2005)에서 하정우는 가슴 따듯한 사람으로 나오고 그의 후임으로 온 친구는 그런 사랑을 받았음에도 무자비한 자가 됩니다.
그래서 그는 후임을 용서하지 못하고 후임은 자살을 선택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발장도 용서받지 못했기에 남의 물건을 훔칩니다.
먹여주고 재워줘도 주교관에서 금 촛대를 훔쳐 달아난 것입니다.
만약 빵을 훔친 것에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공동체였다면 다시는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교는 그것을 그냥 준 것이라 말합니다.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장발장은 그날 이후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공동체를 만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제자들을 옹호하십니다.
겉보기엔 남의 곡식을 훔쳐 먹고 안식일을 어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모든 율법을 제정하신 분과
함께라면 그 공동체는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회개가 일어나고 죄의 용서가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아마 다시는 예수님께 그런 상황을 만들어드리지 않기 위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코는 처음에 바오로와 바르나바 공동체와 함께 다녔습니다
(물론 그 마르코가 마르코 복음 사가인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형성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르코가 바오로의 뜻을 거스릅니다.
그래서 더는 마르코를 데리고 다니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바르나바는 마르코가 사촌이었기 때문에 그를 옹호합니다.
이 때문에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갈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마르코가 베드로의 통역관 일을 맡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마르코는 자신의 믿음이 교회 공동체 때문에 형성되었고 그 공동체가 자신 때문에 갈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오로에게 용서를 청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바오로가 용서해 주어서 자신이 변화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마르코가 회개를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공동체의 자비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는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에서 죄의 용서가 일어나고 새로 태어남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은 벌 받는 게 두려워서 지켜야만 하는 율법주의자 수준에서는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누군가의 회개를 이뤄낼 수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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