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마르코 2,18-22
공동체 결속의 힘은 규율이 아닌 자비
오늘 우리가 읽는 마르코 복음의 흐름 주제는 ‘공동체의 중요성’입니다.
공동체는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죄를 용서받습니다.
세리들의 공동체가 그랬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이와 상반되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 공동체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행위’, 즉 ‘율법’을 공동체가 유지되는 힘과 원리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두 공동체는 단식이라는 규율 안에서 누가 더 잘하는가 경쟁이라도 하듯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분명 예수님께서 추구하시는 공동체의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당신은 신랑이고 제자들은 그 신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입니다.
사실 당신의 신부라고 이야기하면 그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기에 그냥 손님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 가르침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어쨌건 분명 예수님의 공동체와 바리사이들의 공동체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 두 공동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자유’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공동체에서는 율법을 어기면 바로 퇴출당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공동체에서는 유다가 끝까지 거부하지 않는 한 그를 품어줍니다.
이 두 공동체를 비교할 때, 군대와 수도회를 생각하면 쉬울 것입니다.
군대는 규율에 따라 통제되고 그 규율만 잘 지키면 칭찬을 받습니다.
히틀러가 처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은 곳이 군대입니다.
반면 수도회는 군대와 다릅니다.
분명 규율이 있지만, 그 사람이 평가받을 때는 성령으로 충만한가가 그 평가 기준이 됩니다.
또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 수도회를 나갈 수 있고 다른 영성이 있는 수도회로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수도회들은 지나치게 규율을 강조해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보다 조금은 바리사이 공동체에 가까운 모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신학교도 수도회와 다를 바가 별로 없기에 한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한국에서 독일 신학교로 유학을 하러 갔던 한 신학생이 원장 신부님에게 불려가서 혼났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너는 왜 매일 미사에 나오니? 정신적으로 좀 문제 있는 거 아니야?”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한국 신학교에서는 미사에 빠지면 신앙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고 그것이 반복되면 신학교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규율이 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그렇게 규율을 잘 지켜도 방학만 되면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유럽의 신학교는 매우 자율적입니다.
신학교 열쇠도 있어서 밖에서 잠자고 들어와도 특별히 공동체의 분위기만 해치지 않으면 뭐라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듯 규율이 강한 공동체에서는 그 규율 때문에 성령을 받는 것에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
규율을 잘 지키는 것으로 성령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자유 방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이라 한다면 딸이 딱 몇 시까지 안 들어온다면 호통을 치는 그런 가정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지켜줘야 할 마땅한 것을 지키든지 말든지 할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언제까지 자녀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가 보장되었을 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시키지 않아도 모든 규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공자가 칠십을 일컫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즉 “아무리 자신의 욕구대로 살아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라는 삶일 것입니다.
사제가 되어서도 보좌 때는 주임 신부에게 귀가 시간을 강요당하기도 합니다.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도 그런 규정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술 마시고 새벽에 들어온다고 사제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물론 사제를 보호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혼자 살아야 할 때가 옵니다.
죄지을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공동체에서는 자신이 죄인인 줄도 모르고 자신을 단련할 기회도 잃을 수 있습니다.
신학생으로서, 혹은 사제로서 훌륭하게 성장하려면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는 그 정체성을 잃지 않게 만드는 한도 내에서는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스스로 죄와 싸워보고 그래서 안 되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 그리스도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됩니다.
시골에서 함께 자라며 결혼을 약속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둘은 자신들만의 아지트에 있는 나무를 하트 모양으로 파고 자신들 이름의 머리글자를 새겨 넣으며 결혼을 약속하였습니다.
둘은 성장하여 성당에서 결혼하고 근처 도시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임신하고 육아에 바쁘게 되자 남편은 오히려 비뚜로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술을 마시고 아내에게 욕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폭력을 행사할 때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바보처럼 참았습니다.
아버지 없는 아이들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그런 아내가 더 바보 같았고 직장 동료와 외도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그 외도하는 여자도 자신의 가정을 지키겠다고 그런 관계를 더는 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남편은 사는 게 뭔지 생각하며 예전에 아내와 결혼 약속했던 곳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크게 자란 자신들만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무에 큰 못들이 박혀있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아파져 왔습니다.
집에 돌아와 남편은 아내에게 자신들의 나무에 못이 박혀있다고 말했습니다.
아내는 “사실 당신이 외도하는 것을 다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나를 아이들 앞에서 무시하고 욕하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할 때, 그리고 외도하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이 나무에 못을 박았어요.
이 나무는 우리의 기억이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밤 남편은 몰래 나와 그 나무를 부여잡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아내에게 더는 못을 박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자녀들을 다 결혼시키고 인생의 황혼 녘에 부부는 또 그 나무를 보러 왔습니다.
그런데 못이 다 빠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당신이 고마울 때마다 못을 하나씩 뺏더니 이제 하나도 남아 있지 않네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아직 멀었어. 못은 없어졌지만 못 자국들은 그대로 남아 있잖아.”
돌아올 수 없는 죄는 안 되겠지만, 어느 정도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가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는 꼭 필요합니다.
그래야 성장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지, 아예 그런 것을 차단해버리면 자신이 의인인 줄 알고 성장도 멈춰버립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규칙으로 통제된 공동체가 아닌 자율적인 공동체를 원하셨습니다.
바로 신랑과 신부와 같은 관계의 공동체입니다.
신랑과 신부 사이에는 분명히 지켜야 할 선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의처증, 의부증 걸린 사람처럼 상대를 믿지 못하여 통제하는 공동체는 아닙니다.
꼭 필요한 신의와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자유를 줄 수밖에 없는 성령으로 맺어진 그러한 공동체를 원하셨습니다.
물론 살다 보면 그런 선을 넘는 실수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엮였기에 서로 용서하며 성장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공동체가 신랑과 신부의 관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공동체의 힘은 잘잘못을 따지는 규율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는 성령에 있습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인 성령을 담는 새 가죽 부대의 공동체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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