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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11-07 조회수 : 953

나의 영광을 주님께 돌린다고? 
 
 
오늘 복음은 ‘약삭빠른 청지기 비유’의 결론입니다. 
약삭빠른 청지기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재물이 모두 하느님 것임을 알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의롭지 않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그들은 돈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으니 하나를 사랑하려면 하나를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돈과 명예나 육체적 만족을 좋아하는 것을 끊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 것들을 좋아하면서 주님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금송아지를 섬기며 십계명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하나는 깨어져야 합니다. 
아니면 신앙이 위선이 됩니다. 
 
멕시코시티 근처에 아스테카 문명을 볼 수 있는 떼오띠우아칸이란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이집트 피라미드처럼 생긴 고대 달과 뱀의 신을 섬기는 커다란 제단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자신의 농사가 잘되게 해 달라고 자신들이 잡아 온 전쟁포로들을 산 채로 신에게 바치는 제사가 행해졌습니다. 
 
과연 이들이 정말 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신을 섬기는 예배를 올렸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농사가 잘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습니다. 
농사가 잘되게 하는 것이 신을 섬기는 것보다 우선되었습니다. 
 
어떤 신학교 교수님이 방학을 맞아 즐겁게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에게 “지금 당장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천국에 가겠느냐, 집에 가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학생은 “천국에 가기 전에 아무래도 집에 먼저 들러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농사가 예배의 첫 번째 목적이었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것으로 자신들이 높이 평가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궁극적 목적은 ‘자기 영광’입니다. 
궁극적인 우상숭배는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사이들이 돈을 좋아했던 이유는 의식주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부자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떤 유명한 개신교 찬양 전도사가 어느 날 찬양 집회를 마치고 눈물을 흘리며 이런 고백을 대중들 앞에서 했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찬양 집회를 인도했지만, 집회 후 남은 것은 허무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오늘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 자신을 나타내려는 마음이 내 속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깊은 밤의 어둠처럼 가려왔던 것입니다.” 
 
저도 주님을 전하며 많은 강의를 했습니다. 
사순 강의를 20차례 하고 마치는 마지막 날, 기뻐야 하는데 공허감이 찾아왔습니다.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주님만을 전하려는 마음으로 강의를 했지만, 신자들의 박수갈채에 나도 모르게 중독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독은 갈수록 심해져 큰 박수갈채를 받아도 성이 차지 않게 된 것입니다. 
 
자기를 섬기는 사람이 주님도 섬기겠다고 하니 주님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이용당하는 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의 욕구를 추구하는 사람은 위선적 신앙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위선적 신앙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유혹이라는 것 자체의 위험성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그저 영광을 주님께 돌리고 재물을 주님께 봉헌하면 된다고 믿습니다. 
심지어 돈을 벌어야 교무금이라고 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자식이 성공해야 주님께 찬미라도 드릴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리사이들이 주님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그런 욕심 때문에 우상숭배에 중독될 가능성이 큽니다. 
 
‘반지의 제왕’이란 영화에서 ‘반지’는 힘이고 권력이고 영광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작고 착한 인물이 하나 나오는데 호빗 ‘프로도’입니다. 
문제는 반지를 끼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악을 쳐부술 수 있지만 계속 끼고 있으면 빼고 싶은 마음이 점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착한 프로도까지 눈빛이 바뀌고 반지를 빼려 하지 않습니다.  
 
반지를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난 골룸이나 그 반지를 결국 내어주어야 하면서도 더 오래 갖고 싶어 하는 프로도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영광이란 이런 것입니다. 
오래 만지고 있으면 중독됩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다가 영광에 중독되고 맙니다. 
재물을 주님께 돌리려다가 재물에 중독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면서, 그런 유혹 거리를 내가 먼저 만져보고 즐기고 돌리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유혹 거리를 옆에 두려는 것부터가 교만입니다. 
 
내가 주님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공허하다면 
분명 내가 주님께 바치고 있는 것들에 중독되었을 것입니다. 
중독되면 분명 공허함이 찾아옵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면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은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남들에게 성인 대접을 받게 되면서부터는 사람들을 떠났습니다. 
성인들도 유혹을 이기려 한 것이 아니라 유혹을 피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혼자 외로이 죽는 것을 택했습니다.  
 
‘나의 영광’을 주님께 돌리려 하지 마십시오. 
내 것으로 생각할 때부터 영광에 중독됩니다. 
어차피 나의 것은 없습니다. 
주님께 바치는 영광에 중독되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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