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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0-11-05 조회수 : 937

11월5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5,1-10 
 
행위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내버려 둬라 
 
 
오늘부터는 루카 복음에서 말하려고 하는 ‘회개란 무엇인가?’란 주제가 이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는 것을 보고는 못마땅해합니다.
이런 그들을 보며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가 당신이라고 하십니다. 
 
왜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는 광야에 버려둔 채 한 마리 양만을 찾아 나설까요?
그 한 마리 양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양을 광야에 버려둔다는 말은 죽도록 내버려 둔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죽도로 내버려 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 행동을 십계명에 맞게 바꾸기면 하면 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결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압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회개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될 수 있다고 믿는 것에서
그리스도가 아니면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애니멀봐’ 채널 유튜브에 재미있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냥이 초록이와 거위 두두의 이야기입니다.  
 
거위가 알을 낳았는데 거위가 그 알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농장 주인은 그 알을 닭이 품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닭은 부화한 거위 새끼를 자기 새끼가 아니라고 쪼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새끼가 죽어 슬퍼하는 고양이가 있어서 고양이와 거위 새끼를 함께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고양이의 모성애가 발동하였고 이에 거위는 자기를 사랑해주는 고양이를 엄마로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자기를 고양이로 믿는 즉시 거위로 사는 삶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고양이 초록이와 거위 두두는 행복합니다. 
 
또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두두가 자기가 고양이라고 믿는 이상 절대 거위들과 어울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거위들과 한 곳에 넣어두어도 자신이 고양이인 줄 알고 엄마만 찾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찾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 행동을 바꾸려는 노력이 아닙니다.
끝까지 행동에 의존하려 하면 예수님은 그들을 광야에 버려둘 수밖에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갈라 3,10)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로마 3,28) 되기 때문입니다. 
 
‘애니멀봐’에 날지 않고 걷는 독수리가 나옵니다.
독수리인데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해 인간에게 키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인간인 줄 알고 날지 않고 두 발로 걸어 다닙니다.
살아있는 것은 먹지 않고 물고기를 잡아서 찢어 주어야만 먹습니다.  
 
인간의 손 위에 앉을 때다 인간의 손을 다치지 않게 살짝 잡습니다.
경쟁의식을 고취 시기키 위해 다른 독수리가 사냥하는 것을 보여주어도 꼼짝하지 않습니다.
귀엽기는 한데 본성을 찾지 못하는 것이 불쌍하기도 합니다. 
 
또 TV 동물농장에서는 11년 동안 사람과 한집에서 지낸 원숭이 삼순이도 나옵니다.
동남아 여행 중 식자재로 쓰이는 새끼 원숭이가 불쌍해서 사서 풀어주었는데 계속 따라와서 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숭이는 원숭이가 먹는 바나나나 과일을 좋아하지 않고 자장면과 같은 중국 음식을 더 좋아합니다.
사람을 부모로 믿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동물들은 행동을 바꾸려고 하면 절대 바뀌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근간에 자신이 고양이나 사람이라 믿어버린 자기 부모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행위를 변화시키는 것은 그냥 흉내만 내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아직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음을 바꿔주러 오신 예수님을 보며 아직도 행위만 바꿔보겠다고 주장하는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광야에 내버려 둔 채 당신을 받아들일 줄 아는 세리와 죄인들에게로 가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분의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이 생각을 바꾸는 과정이 회개입니다. 
 
만약 자신이 키워 자신을 부모로 여기는 독수리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끝까지 자신을 부모로 여기게 만들어 그 독수리를 자신 곁에 놓아두어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이 부모가 아니라 참 부모는 독수리임을 알려주어야 할까요?  
 
위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자기 삶을 찾은 동물은 독수리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독수리임을 조금씩 믿어가기 시작했고 날아보니 인간이 할 수 없는 것까지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도 자녀들을 아버지께로 보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한 욕심을 부리며 자기 품에만 두려고 한다면 성당에 보내면서도 자신이 부모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자녀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만들려면 하느님만이 유일한 아버지이심을 믿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여 그분의 어깨에 올라타게 해야 합니다.
그분 없이는 그 믿음으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면 자신도 다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만약 그럴 수 없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어린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시는 그림을 보여주며 예수님이 하시면 우리도 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십시오.
이것이 진정 지금까지 나에게 자녀를 맡겨주신 주님께 보답해드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행위만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한다면 우리는 결국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광야에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 안에서도 전반적인 회개의 움직임이 필요한 때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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