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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1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10-10 조회수 : 670

인간의 3대 고통 
 
 
오늘 복음에서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이렇게 소리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마치 “저렇게 훌륭한 자녀를 두었으니 저 엄마는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부러워하며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의 생각을 조금 바꿔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행복’에 관한 말씀이 됩니다. 
이 짧은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주려 하십니다. 
 
행복을 알려면 고통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자칫 우리는 진정한 고통이 아닐 수 있는 것도 고통이라고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죽음이 고통이라고 여긴다면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돌아가시면서, “저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몸의 고통이 불행이라고 믿는다면 젊고 예쁜 나이에 온몸에 3도 화상을 입고 수많은 고통스러운 수술을 한 뒤에도 지금 행복하여 자신은 이전의 예쁜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이지선씨를 보면 될 것입니다. 
 
혹은 못생기고 병이 들고 부모로부터 버려지는 것이 불행이라고 여긴다면 얼굴에 모반을 가지고 태어나 부모로부터 버려지고 다른 쪽 얼굴엔 암이 들어 
뼈까지 깎아내야 했던 김희아씨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불행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을 가졌음에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불행과 고통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저는 불행과 행복을 조금 더 본성적이고 근원적으로 접근해 보고 싶습니다. 
저는 불행을 3단계로 나눕니다. 
 
첫 번째 불행과 고통은 인간 본성의 자유를 제약받는 것입니다. 
정태춘씨 노래에 ‘우리들의 죽음’이란 제목이 있습니다. 
이 곡은 1990년 3월 실제 발생했던 어린 남매의 화재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애절한 멜로디와 슬픈 가사로 표현한 곡입니다. 
 
서울 지하 셋방에서 다섯 살 혜영이는 방바닥에 엎드린 채, 세 살 영철이는 옷더미 속에 코를 묻은 채 숨져 있었습니다. 
부모는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힘에 겨워 서울에 올라와 지하 셋방을 얻어놓고 맞벌이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어 방에 두 아이를 놓고 혹시 부엌에 칼을 만지거나 
밖에 나가 길을 잃을까 봐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근 상태였습니다.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는 성냥으로 불장난하던 것이었고 그렇게 사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부모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존엄성인 자유를 박탈당하였습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성장하여서도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을 갖기 어렵습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1995)는 오직 자유만을 위해 싸우는 한 인물이 나옵니다. 
세상에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 고통은 자유롭기는 하지만 자아의 본성을 따르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것은 자아와 자신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기쁜 것을 우리 기쁨으로 여기지만 실상은 자아의 종살이를 하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자신이 늑대인 줄 알고 산다면 자신은 행복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는 그것은 고통입니다. 
 
마를린 먼로는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하였고, 헤밍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운지도 모르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많은 부자와 정치인, 연예인들이 이런 고통을 겪습니다. 
자유가 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다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공허함을 마를린 먼로는 폐장한 해수욕장과 같다고 표현했고 헤밍웨이는 끊어진 필라멘트와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인간을 만나야 합니다.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오지 못하면 항상 다 채워져도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 고통은 더 큰 행복이 무엇을 따름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따르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인간을 만나 자신이 인간일 수도 있음을 믿어도 자신이 하는 행동은 늑대의 그것을 정확히 닮아있습니다. 
하려고 해도 안 되는 이런 상황이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가장 힘들었을 때를 보면 조금 늦은 나이에 성소를 느껴 ‘신학교 가야 하나, 이대로 살아야 하나?’를 고민할 때였습니다. 
이때의 1년은 참으로 힘들어서 겨울 바다에도 빠져보고 술도 많이 마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나서부터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과연 예수님을 낳고 젖을 먹여 행복하셨던 것일까요? 
성모님께서 기쁨의 노래인 마니피캇을 부르실 때는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였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하신 것을 넘어 하느님의 뜻을 잉태하셨던 것입니다. 
그 뜻을 따르는 삶이 남들이 보기에는 목숨을 건 여행일 수 있으나 그 당사자에게는 위 세 개의 인간의 큰 고통을 넘어서는 참 기쁨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인간의 완성을 이루어줄 수 있는 유일한 보물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에게 인간으로서의 충만한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뜻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 자녀의 행복까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하느님의 행복까지도 누릴 수 있는 우리가 기뻐해야 할 유일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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