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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1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9-13 조회수 : 547

9월13일 [연중 제24주일] 
 
집회서 27,30―28,7
로마 14,7-9
마태오 18,21-35 
 
용서? 아침에 고행하라!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일만 탈렌트를 탕감받은 종에 관한 비유입니다. 
1만 탈렌트를 탕감받았으면서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빚 독촉을 해대는 못된 종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용서받았으면서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 용서했는지, 그렇지 못한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왠지 용서한 것 같으면서도 또 그 사람을 보면 화가 나는 수가 있습니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은 자기 아들 유괴범이 마음이 편한 것을 보고 화를 참지 못합니다. 
머리로는 용서하였지만, 마음으로 되지 않은 것입니다. 
 
마음으로 용서하였다면 그 사람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어도 마음이 동요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동요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용서했다면 나는 그 사람이 어떤지에 상관없이 항상 기분이 좋아야 합니다. 
그분이 좋아지지 않는 용서는 아직 진정한 용서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원수 앞에서 기분이 좋아질 수 있을까요? 
 
알바니아 예수회의 ‘안톤 룰릭’ 신부는 서품을 받은 해 12월 19일, 공산정권에 의해 17년간은 감옥에, 그 후 다음 17년간은 노동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의 첫 번째 감옥은 몹시 추운 외딴 산골 마을의 한 작은 화장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9개월간 누울 수도, 다리를 펼 수도 없는 상태로 인분 위에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해 성탄절 밤에 간수들은 그를 다른 화장실로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밧줄에 묶어 매달았습니다. 
조금씩 혹독한 냉기가 전신을 휘감았고 심장은 곧 멈출 것만 같았습니다. 
룰릭 신부는 엄청난 절망감으로 크게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그러자 간수들이 달려와 그를 바닥에 내려놓고 마구 구타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그 더럽고 혹독한 고통 속에서 룰릭 신부는 예수님의 강생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위로가 느껴졌고, 심지어 마음 깊이 신비로운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고문자들에게 그는 어떤 미움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1989년 79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석방되었을 때, 
룰릭 신부는 우연히 만난 간수에게로 달려가 그를 진심으로 껴안았습니다.
[출처: ‘안톤 룰릭 SJ 신부 이야기’, 김영석 신부(예수회), ‘기도의 사도직’ 카페] 
 
안톤 룰릭 신부의 용서는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분을 들어 높이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성령은 당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이에게만 당신 은총을 허락하십니다. 
 
100데나리온은 1만 탈렌트의 6십만 분의 1입니다. 
6조 원의 로또가 당첨된 사람이 천만 원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고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일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일상에서는 내가 돈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받은 죄 용서의 가치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6조 원을 거저 받아도 기분이 좋지 못한 것입니다. 
기분이 좋지 못하니 작은 일에도 분통이 터지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돈의 가치를 알려면 그것을 조금은 써봐야 합니다. 
돈의 가치를 모르는 아기에게 그 많은 돈을 주어봐야 사탕 하나 때문에 짜증 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받은 것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로부터 받는 1만 탈렌트의 가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일만 탈렌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 값으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우리 대신 죗값을 치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히 그 가치를 올바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다만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1만 탈렌트를 다 써봐야 그 값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서 한 데나리온만 써봐도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 데나리온의 가치는 내가 고행을 할 때 깨닫게 됩니다. 
주님 피의 값을 알기 위해 아주 조금만이라도 그 고통에 동참해보는 것입니다. 
 
요즘 고행을 말하면 중세시대 낡은 골동품 취급을 당합니다. 
그러나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과 어느 한 젊은 사제의 대화를 들어봅시다.  
 
한 젊은 신부가 비안네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비안네 신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나를 통해 하신 것이며 나는 그저 도구였을 뿐입니다.” 
 
젊은 신부가 대답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누구도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영혼들에게 아무 일도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왜 다른 신부들은 신부님이 고해성사 중에 하시는 기적을 행할 수 없는 걸까요? 
그들도 하느님 은총의 도구인데요. 
그들도 영혼들에게 좋은 일을 하려고 매우 열심히 기도하는데요.” 
 
비안네 신부는 망설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거룩한 친구이며 스승인 밸리 신부가 자신에게 종종 말하던 것을 그 젊은 신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죄인들의 변화는 기도로 시작하여 참회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 죄인이 사제이든 친구이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군가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그들을 위해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기도는 물론이요 단식하고, 잠을 포기하고라도 힘든 고행을 감수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또 자신의 양 떼들을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고통을 겪지 않는 목자는 완전히 실패할 위험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참아 받는 고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과 일치하게 될 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은총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은총에 감사하고 기쁘지 않을 수 없고 
내가 그들에게 흘려주는 은총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도 알게 됩니다. 
 
기도 자체가 고행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맞갖은 고행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아침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기도하신 그 시간을 짧게라도 반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께 받은 1만 탈렌트에 감사하게 되고 하루 동안 나에게 잘못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고행하기 어려우면 운동을 조금 힘들게 해도 됩니다. 
건강도 좋아지니 일거양득입니다. 
 
용서하려고 노력하기보다 내가 받은 용서의 가치를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고 공부하고 고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우리 죄의 용서는 공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일만 탈렌트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많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됩니다.  
 
이 기쁨 없인 어떠한 용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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