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보다 학교를 먼저 짓는 마음으로
현대는 창의력의 시대라고 합니다.
스마트폰과 같은 창의적인 발상이 세상을 바꿉니다.
그런데 그 창의력은 어디서 나올까요? 공부를 열심히 하면 창의력이 생길까요?
저는 ‘기분’이 창의력을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한 조증 환자의 사례가 나옵니다.
올리버 색스는 영국의 신경과 의사입니다.
그에게 지나치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미겔이란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올리버 색스는 그에게 동그라미에 엑스 표를 한 그림을 보여주고 그것이 무슨 그림인지
맞춰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늠름하게 “이건 뚜껑이 열린 상자인데요, 그 속에 사과가 하나 들어있네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엄청난 상상력이었습니다.
다음번에는 더 기분 좋은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다시 동그라미 속에 엑스 표를 한 그림을 보여주었더니 그는 “아, 이거요. 어떤 아이가 연을 날리고 있는 것을 위에서 내려다본 것이네요.”라고 하였습니다.
며칠 후 그가 다시 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매우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조증이 온 것은 신경을 훼손하는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안정제를 투여받았어요.”
올리버 색스는 역시 똑같은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이건 동그라미 속에 들어있는 엑스 표네요.”
정확히 맞추었습니다. 그에게 창의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창의력은 무엇일까요?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일까요?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폰을 발명했다고는 하지만, 스마트폰은 그저 당시에 있던 전화기와 아이팟의
화면을 결합한 것에 불과합니다.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안 계십니다.
창의력은 이미 존재하지만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다른 이들은 예수님을 보고 세례자 요한아니, 엘리야, 혹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직 베드로만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창의력입니다.
남들은 볼 수 없지만, 베드로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창의력은 자신의 힘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그것을 어떠한 방법으로 알려주신 것일까요?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입니다. 좋은 기분입니다.
베드로의 창의력, 즉 남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능력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령으로 기쁘고 평화롭고 사랑하기 때문에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고 교회를 세우신 다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분명 교회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는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하지 말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네가 깨달은 방식대로 깨닫게 하여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제대로 본 것이 성령님 때문이지 누구에게 설명을 들어서가 아닌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것도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해 주는 것이어야지 설명으로 다가가서는 안 됩니다.
이는 마치 지하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며 복음을 전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기분이 나쁘면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습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이러한 사례도 나옵니다.
성악가 출신 P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올리버 색스를 방문할 당시는 음악 교사로 재직할 무렵이었습니다.
완벽한 자신의 생활에 만족했던 P 선생, 그런데 그 일이 시작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학생들이 보이지만, 누가 누구인지 인식 불가하였고 결국 목소리로만 학생을 구분해야만 했습니다.
가끔은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습니다.
길을 가던 중학교 학생들이 발견한 P 선생은 아무도 없는데 혼자 “너희 뭐 하니? 왜 그러니? 여기서 뭐 하니?”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선생님, 주차 정산기랑 소화전 앞에서 뭐 하세요?”라고 물으니 선생님은 연기 연습하는 것이라고 하며 농담으로 간신히 넘어갑니다.
P 선생은 당뇨병으로 눈이 잘 안 보이는 게 원인인 줄 알고 안과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안과에서는 눈의 질환이 아닌 것 같다고 신경 전문의에게 가볼 것을 권유했습니다.
P 선생의 반사 반응 검사를 한 올리버 색스가 이제 신발을 신으라고 했을 때, P 선생은 자신의 발을 신발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검사가 다 끝났다고 여겼는지 P 선생은 모자를 찾기 시작했고 함께 온 아내의 머리를 잡고서 자기 머리에 쓰려고 했습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늘 있는 일이라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항상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를 멈추면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노래를 부를 때 가장 행복했고 그때면 모든 것을 제대로 보이지만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제대로 보아야 하는 것도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올리버 색스가 이런 처방을 내렸습니다.
“만약 제가 처방을 내린다면, 이제까지 음악이 선생님 생활의 중심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생활 전부라고 생각하고 음악 속에 파묻혀서 생활하시라고 하고 싶습니다.”
질병의 점진적인 악화에도 불구하고 P 선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음악을 가르치며 살았습니다.
물론 노래를 부르지 않을 때 가끔 일어나는 익살스러운 실수를 빼고는.
행복하면 보이고, 행복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 행복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시며 왜 예수님은 당신이 그리스도란 것을 알리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먼저 성령을 주려고 해야지 지식을 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준다면 사람들은 그 교회를 만드신 분이 그리스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아무리 합당한 증거를 대더라도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에게 어느 정도 돈이 모였을 때 그분은 아이들을 위해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성당을 먼저 세우는 것이 나을까, 학교를 먼저 세우는 것이 나을까?
신부님은 성당보다 학교를 세우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원하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따르면 그것이 옳습니다.
아이들을 먼저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이태석 신부님을 통해 보이는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요즘 얼마나 종교들이 세상에 해악을 입히고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까?
그러면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성당은 크게 지으면서 성당 옆에 있는 가난한 이들은 돌보지 못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면서 당신이 누구인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성당보다 학교를 먼저 짓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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