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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8-01 조회수 : 657

8월1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예레미야 26,11-16.24
마태오 14,1-12 
 
​두 종류의 행복이라는 마약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인간은 무엇으로 살까요? 
왜 어떤 사람들은 무기력증에 시달리거나 심지어 자살까지 하게 될까요? 
그 비밀은 ‘행복’에 있습니다. 
행복에 취해야 삶의 의욕도 생깁니다. 
 
한 사향노루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람이 불 때마다 어디선가 오는 사향의 냄새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그 냄새가 나는 근원지를 찾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그 사향의 근원지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찾아도 더는 그 근원지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자살을 선택합니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가면서 깨진 자신의 몸 안에서 
사향의 향기가 솟구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쫓는 행복이 없다면 삶을 살아갈 힘을 잃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문제는 위 사향노루처럼 그 행복을 외부에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배고플 수밖에 없고 결국 그 배고픔을 더는 채울 길이 없게 되면 
죽음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삶이 행복이라는 미끼로 자신을 연명시키는 것입니다.  
 
영화에 보면 마약을 팔 때 우선 몇 번은 거저 줍니다. 
그리고 그 맛에 길들었을 때 비싼 값에 마약을 판매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중독됩니다. 
우리는 그런 중독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사실 모든 동물은 이 행복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은 먹이를 먹을 때 가장 행복해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 행복이 오래간다면 더는 먹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죽게 됩니다. 
다시 배가 고파야 그 행복을 느끼고 싶어서 먹이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런 행복에 중독되면 동물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많이 나오는 영화의 ‘좀비’와 같이 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복음에 등장합니다. 바로 헤로데입니다.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요한 세례자를 죽이는 내용입니다. 
요한은 그나마 헤로데에게 충언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도 군중이 무서워 요한을 죽이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데가 요한을 죽일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중독된 행복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 행복에 대한 집착이 자신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목소리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면 누구나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목을 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법원은 최근 데보라 짐머만이라는 여성에게 ‘태아 살인미수죄’를 적용해 자녀 양육권을 박탈했습니다. 
알코올중독자였던 짐머만은 임신 9개월인 상태에서 한 파티에 참석해 많은 양의 술을 마셨습니다. 
그녀는 만취한 상태에서 산욕을 느껴 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신생아의 혈중알코올농도가 무려 0.2%에 육박했습니다. 
산모의 상습적인 음주로 인해 신생아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였습니다.  
 
법원은 함량 미달의 모정에 대해 ‘양육권 박탈’을 선언하고 ‘살인미수죄’를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술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한 어머니의 무책임이 한 어린이에게 ‘저능아’라는 비극적인 이름을 남겨주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세상 행복에 중독된 만큼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행복은 죽어갑니다. 
사랑에서 오는 행복도 하나의 미끼입니다. 살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행복은 영혼을 살게 합니다.  
 
올해 백 세가 되시고 ‘백 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쓴 김형석옹은 장수의 비결을 물었더니 ‘절제’라고 대답했습니다. 
육체의 만족을 절제하는 삶이 장수의 비결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언제 가장 행복했느냐고 물으니 ‘사랑 때문에 힘들었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행복과 육체의 행복,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잡으려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행복에 무관심해도 안 됩니다. 
삶의 의욕을 잃게 됩니다. 
어차피 행복은 생존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랑으로 육체가 죽는 행복을 선택할 것인지, 
육체의 행복을 찾아 사랑으로 오는 행복의 목을 칠 것인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점점 세상의 행복을 끊어가고 있다면 참 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끊어가는 세상의 행복이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참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행복에 취할 거면 영원히 살게 만드는 행복에 취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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