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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2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6-29 조회수 : 571

6월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사도행전 12,1-11
2티모테오 4,6-8.17-18
마태오 16,13-19 
 
​외롭든지, 불편하든지! 
 
 
이번 코로나 사태 이후, 앞으로는 ‘비대면 사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많이 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비대면으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본성상 사회적 동물임을 간과한 채 쏟아내는 예측입니다.  
 
지금 코로나가 장기화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제 사람들이 집에서 버티는 것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람과 대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한 자매님이 상담을 원해 들어주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받아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만 있다 보니 우울증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우울증 증세 안에는 세상에 나 혼자라는 외로움도 들어있습니다.  
 
사람은 관계를 맺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더 심해지면 귀신도 볼 수 있고 환청도 들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데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해버리면 저절로 마귀와도 관계를 맺게 됩니다. 
 
제가 보좌 신부로 어떤 본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날은 비가 억수같이 왔습니다.
오전 10시 미사를 마치고 신자분들과 인사를 하고 성당 로비에는 저 혼자만 있었습니다.  
 
사제관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한 자매님이 비를 홀딱 맞고 머리를 귀신처럼 늘어뜨리고 성당으로 들어왔습니다.
제 앞으로 오더니 뜬금없이 상담하자고 하였습니다.  
 
자신 안에 마귀가 있는데 그 마귀가 지금 성당에 들어가면 보좌 신부 혼자 있을 것인데 상담을 하고 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서울 사는 사람이고 신자도 아니고 그냥 지나는 길이였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집무실로 들어가 문을 열어놓고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냥 상태만 보아도 노처녀에 경쟁심이 클 것으로 보였습니다.
예쁘기는 했지만 무서운 사감 선생님처럼 생겼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분은 보험설계사로 나름 잘 나가고 있었습니다.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였고, 특별히 남자들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다른 것은 부족함이 없는데 ‘외로움’ 때문에 마귀를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종교는 없지만, 그 존재가 마귀인 것은 안다고 하였습니다.
그 마귀와 심지어 잠자리까지 함께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갑자기 서울 어디 사는지가 궁금하여, “아까, 잠실에 사신다고 하셨나요?”라고 물으니,
남자의 거친 목소리로 바뀌며 눈을 매섭게 뜨고 소리치듯 말했습니다.
“제가 언제 잠실이라고 했어요, 목동이라고 했지.” 
 
자신이 한 말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화가 난 것입니다.
저는 좀 무서웠지만 위축되면 안 되기에,
“아니, 그럼 자매님은 한 번 들으면 다 기억해요?”라고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아뇨.”라고 하며 인정하였습니다. 
 
저는 이럴 때마다 말해줍니다.
마귀는 자신이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외로워서 스스로 마귀와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 우리 선택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외롭든가, 불편하든가.” 
 
분명 사람을 만나는 일은 불편합니다.
혼자 있으면 편합니다.
세상은 경쟁의 시대이고 그렇게 사람을 경쟁자로 보게 만듭니다.
그렇게 혼자가 되고 몸은 편합니다.
그러나 마귀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마귀와 친구가 되는데 어떻게 외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보이기 시작하면 엄청 불편합니다.
혼자 있을 때도 혼자가 아니게 됩니다.
그분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불편의 정도가 달라집니다.  
 
오늘은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그분들은 매 순간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삶을 살았습니다.
베드로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보았고, 바오로만이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며 항상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불편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면 영원히 외롭게 살아야 합니다. 
 
어린이들을 받아들이던 수도회가 있었습니다.
스승은 그 작은 수사님들 중 한 아이만 특별히 사랑하였습니다.
이에 다른 아이들의 불만이 컸습니다.
그래서 스승은 각자에게 참새 한 마리씩 주며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죽여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수도원에 머물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다들 으슥한 곳을 찾아 참새를 죽여왔습니다.  
 
그 작은 아이만 못 죽이고 참새를 살려서 가져왔습니다.
왜 죽이지 못 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리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곳을 찾아도 주님께서 보고 계셔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모든 수사는 왜 원장이 그 아이만 사랑하는지를 그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참호에 수류탄이 떨어지면 군인들은 분명 어떠한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집어던지던지, 피하든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라면 수류탄이 떨어져도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이도 이와 같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사신 분들이 성인들이시고, 오늘 특별히 공경하는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입니다.  
 
외롭든지 불편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며 온종일 불편한 삶을 산다면 외로움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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