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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2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6-28 조회수 : 620

​상대가 나를 진정으로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두 부류가 있습니다. 
나를 진정 사랑해서 다가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나를 이용하려고 
다가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를 이용하려 다가오는 사람도 사실 자신이 그런 줄 모르는 때도 있습니다. 
자신은 사랑한다고 다가오지만, 자신의 본성이 아직 저급한 상태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내가 에너지를 더 쏟아야 할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나의 몫입니다. 
이 구분을 잘하지 못하면 모기에게 속아서 피를 빨리느라고 평생을 허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 중에, 나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제가 전에 다니던 치과에서 신경치료를 하다가 저의 치아를 갈라지게 한의사 선생님이 있습니다. 어찌나 미안해하던지 저에게 모든 것을 해 줄 기세였습니다. 
제가 사제라고 말하니까, 신자가 아님에도 자신의 남편의 친구 중에 사제가 있다고 하며 문밖에 나갈 때까지 저에게 관심을 주었습니다.  
 
우선은 갈라진 치아를 임시로 붙여서 크라운을 씌웠습니다. 
쓸 수 있을 때까지 쓰자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 치아가 조금 아파서 같은 치과에 찾아갔습니다. 
그분은 저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저를 대하는 것도 이전과는 딴 판이었습니다. 
그리고 치아가 갈라져 있으니 빨리 뽑고 임플란트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해 놓고 잊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제 치아를 이렇게 갈라지게 한 분이 당신입니다.” 라고 말하여 기억을 되살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꺼냈습니다.
“제가 그때 찾아왔던 신부입 ... .” 
 
그분은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끊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오늘 뽑고 가실래요?” 
 
자신의 의도가 너무 앞서니 제 말은 들리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잠시 제 치아와 이별할 시간을 달라고 말하며 그 치과를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그 치과에 가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치아를 정상적으로 잘 쓰고 있습니다. 
쓸 수 있을 때까지 쓸 생각입니다.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 알려면 나의 말을 경청하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상대가 나를 좋아할 때는 나의 말을 잘 들으려 합니다. 
그러나 건성으로 듣거나 듣지 않으려는 모습이 있으면서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입니다.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저는 몇 년 동안 제 말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저를 좋아하는 줄 착각하여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에게 나가는 것은 무엇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말을 듣고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에 관심이 없으면 그 말하는 사람에게도 사실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관심이 생겨야 그 사람이 말하는 것에도 관심을 두게 됩니다.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일화라고 합니다. 
버나드 쇼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각가 로댕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귀한 로댕의 그림 스케치를 구했다고 하며 그 친구들을 불렀습니다. 
로댕을 좋아하는 그 친구들은 그 그림만 보며 예술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온갖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때 버나드 쇼가 “아, 미안합니다. 
이 그림은 로댕의 것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것이었네요.”
라고 말했을 때 장내는 정적만이 흘렀다고 합니다. 
 
[출처: ‘말의 품격’, 이기주, 유튜브 ‘책 읽는 다락방 J’] 
 
 
사람이 싫으면 그 사람이 하는 말도 싫게 들립니다. 
모든 것이 싫게 들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을 바꾸어 잘 보이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지난 복권을 사려고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빨리 포기하고 나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는 새로운 사람에게로 향하는 것이 
삶을 허비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물론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면 참아낼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쫓아갈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지, 가족이나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당신께서 하시는 말씀을 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으면 아버지에게도 없는 것입니다. 
말씀은 누군가를 알리기 위해 파견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입으로 하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도 예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내가 예수님을 더 좋아하는지, 아니면 이용하기 위해 다가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파견된 사람을 대하는 것이 곧 파견한 사람을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교회에 관심이 없다면 예수님에게도 관심이 없는 것이고, 교회가 하는 말과 가르침에 관심이 없다면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교황 주일입니다. 
교회의 권위에 대해 묵상하는 날입니다. 신자들은 모이면 주로 누구에 대해 말을 많이 하나요? 
아마 본당의 사제와 수녀님들에 대해 말을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는 잘하면서도 뒤돌아서면 그분들을 굳이 안 좋게 말하는 신자분들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들어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 일에 동조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주님께서 왕으로 뽑으셨다는 것 하나 때문에 끝까지 그를 공경하였습니다.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결코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손을 댈 수 없다며 자신의 원수지만 용서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태도는 그분이 파견하신 분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렸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그분께서 파견하신 이도 사랑합니다. 
그 인품에 상관이 없습니다. 
인품이 좋으면 더 좋겠지만, 그분이 파견하신 분이라는 것 하나 때문에라도 공경한다면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매번 인사이동 때마다 주님께서 파견하시는 이들 앞에서 주님께 합당한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한 시험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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