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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5-04 조회수 : 797

5월4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사도행전 11,1-18
요한 10,11-18 

생명은 내어주기 때문에 얻는 것이다 
 
소통 강사 김창옥씨에게 쌍둥이 아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강의에서 아들이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소통 전문가라 자처하지만 정작 아들과는 소통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 문제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어머니에게는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사랑이 딸에게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딸과는 매우 이상적 관계입니다.
집에 가면 딸이 먼저 달려오고 그러면 아버지는 반갑게 딸을 맞아줍니다.  
 
그런데 쌍둥이 아들이 태어났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군대 교관을 흉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창옥씨는 ‘아버지’란 단어가 무슨 뜻인지 인지를 못 한다고 합니다.
그에게 아버지는 술과 도박과 폭력과 가정에 대한 무관심한 분이었습니다.
본인이 아버지를 모르니 아들들에게 아버지를 알려줄 수 없었고 그래서 아들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아버지로부터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하니 어린이집에 가서 다른 아이들을 때리는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상처가 대물림되는 것입니다. 
 
딸이 아빠를 보고 달려오면 아빠는 딸을 ‘공주님’이라 부르고 안아줍니다.
그런데 쌍둥이 두 아들은 눈치를 보고 있다가 “은혜 아빠!”라며 슬금슬금 멋쩍게 다가옵니다.
나의 아빠라 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가 되려면 먼저 착한 목자에게 배웠어야 합니다.
그래야 또 누군가를 착한 목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랑은 흐르는 것이지 나에게서 생겨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3달 동안 열심히 아빠 연기를 하며 따듯하게 대해 주었더니 비로소 “김창옥 아빠!”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기를 3개월 더 했더니 비로소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연기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려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사랑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이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먼저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를 알아야 아버지가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습니다. 
 
강연을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김창옥씨는 공항에서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을 위해 돌담을 쌓으며 함께 허물어진 아버지의 한 다리와 어깨까지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들에게 “미안하다!”란 말을 들었을 때 모든 상처가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소통이 될 때 아들과도 소통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착한 목자는 주인이 주는 사랑을 양들에게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분명히 ‘삼위일체 신비’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의 주인으로서의 아버지와 그 생명을 전해주는 착한 목자로서의 아드님과 그로 인해 태어나는 교회와의 관계입니다.
누구나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려면 하느님의 이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여기서 말하는 ‘목숨’은 성령님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물이자 생명의 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받은 생명을 또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흘려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다시 생명을 받을 자격을 잃게 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신비에의 참여의 기본입니다. 
 
중동에서 남편들이 사막에서 피땀 흘려 벌어 아내에게 가져다줄 때 어떤 아내들은 그것을 자녀를 키우는 데 쓰지 않고 제비들에게 가져다 바쳤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들이 돌아올 때 많은 이혼과 자살이 있었다고 합니다.
관계는 그렇게 깨어집니다.  
 
돈은 피와 같습니다.
그것을 흘려주지 않으면 다시 그것을 받을 자격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는 이가 원하는 이에게 흘려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고 양육하신 모범을 이웃들에게 해야 합니다.
그분은 당신 피를 우리에게 주시며 이웃들에게 흘려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또 받게 될 것입니다.
이 흐름에 참여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에도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웃의 생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 위해서 ‘선교’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성령의 힘으로 나의 피를 이웃에게 뿌려야 합니다.
그 피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들어있습니다.
그 피가 나를 통과하며 나를 영원한 생명으로 채웁니다.  
 
착한 목자는 그렇게 영원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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