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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5-03 조회수 : 662

사도행전 2,14ㄱ.36-41
베드로1 2,20ㄴ-25
요한 10,1-10 
 
​문이 아닌 목자는 도둑이다 
 
 
영화 ‘스틸라이프’(2013)는 고독사를 처리해주는 존이라는 한 구청직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는 고독사 한 사람들을 그가 원했을 법한 종교예식으로 장례를 치러줍니다.  
 
그런데 워낙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기에 그의 일 처리는 매우 더뎠습니다.
고인의 장례식에 와줄 만한 사람의 단서를 찾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연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느린 일 처리에 짜증이 난 그의 새로운 상사는 22년간 같은 일을 해온 그를 해고하고
새로운 사람을 고용합니다.
새로운 직원은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고독사 한 사람들을 재빠르게 ‘처리’합니다. 
 
이제 존은 마지막 일만 처리하면 됩니다.
마지막 대상은 빌리라는 자신의 집 앞에 살았던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아내를 힘겹게 찾아냈지만, 그녀는 빌리의 장례식에 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진첩에 있는 딸을 찾아냈습니다.
딸은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있었고 그렇게 자신을 찾아와 준 존에게 호감을 느끼게 됩니다.  
 
둘은 아버지 장례 때 만나기로 합니다.
그러나 존은 장례식 전날 교통사고를 당해 말 그대로 고독사를 하게 됩니다.
존은 아무도 와주지 않는 장례식을 끝으로 재빠른 일 처리를 하는 직원에 의해 매장됩니다.  
 
그 옆에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존을 기다리는 빌리의 딸과 몇 명의 사람들이 다행히도 빌리의 장례를 지켜봅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존의 주위로 그동안 그가 장례를 치러주었던 모든 고독사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추도를 해 줍니다.
존은 세상에서 혼자였지만 천국에서는 혼자가 아닐 것입니다.
그를 아는 수많은 사람이 그의 주위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남자는 어떤 양치기가 모든 양을 각각의 이름으로 불러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사실인지 직접 가서 물었습니다.
양치기는 한 양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다른 양들은 풀을 뜯으며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있는데 한 마리 양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같은 방식으로 목자는 자기 주위로 12마리를 불러냈습니다. 
 
이를 본 방문자가 말했습니다.
“어떻게 당신은 양들을 분간할 수 있지요? 양들 모두가 다 똑같아 보이는데요.” 
 
목자는 자기 양 중에서 흠 없는 양은 하나도 없어서 각각의 결점으로
자기의 모든 양을 구분했습니다. 
 
목자는 그 남자에게 어떤 낯선 사람도 양을 속일 순 없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목자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서 양 떼에게 갔습니다.
그는 가장해서 목자의 목소리와 아주 비슷하게 말해 보았으나 양 떼 중 어느 한 마리도
그를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마치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아이들처럼, 결점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결점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희생이 필요했음을 말해줍니다.  
 
양들은 목자가 자신들을 위해 그러한 희생을 했기 때문에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목자이십니다.
우리에게 단점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단점을 덮어주셨고 우리는 그 희생을 알기 때문에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처음에는 목자라고 하셨다가 그다음엔 문이라고 하십니다.
목자는 양우리에 이미 있는 양 중에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당신이 이름을 지어준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 아버지께로 인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 안에 있는 양들을 아드님을 통과하여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이렇게 파견받은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양들이 아버지께 가는 문이 되십니다.  
 
문은 양들을 보호하고 또 참 목자에게 양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말은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뜻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이끄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양들을 봉헌하는 문이 되기도 해야 합니다. 
 
처음에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목자들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통과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목자이지만 문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파견되어 양들을 파견하신 분께 이끌어야 하는 임무를 망각하고 자신들이 양의 주인이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에 목자가 양우리에 도착하였지만, 문지기들은 목자를 죽였습니다.
양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누구나 파견받은 목자들입니다.
자신의 우리에 양들을 잘 모아 파견하신 분께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칫 양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면 도둑이 되고 맙니다.
도둑을 조심하고 또 도둑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도둑이 되지 않으려면 파견받은 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길이 되어주어야지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있는 양들을 데리고 나를 밟고 아버지께로 가시게 만드는 길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깊은 산속에 거미 한마리가 오랫동안 친구없이 외롭게 지냈습니다.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거미줄을 보니 이슬 한방울이 맺혀 있었습니다.
“넌 누구냐?”
“난 이슬이야!” 
 
거미는 오랫동안 친구가 없던 차에 “우리 친구 하자!”라고 말했습니다.
이슬은 잠시 생각하다가 “응 그래 좋아.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 나를 절대로 만지면 안 돼!”
라고 말했습니다. 
 
거미는 약속 지킬 것을 이슬에게 맹세했습니다.
그 후 거미와 이슬은 행복을 만끽하면서 외로울 땐 서로 위로하고 즐거움을 서로 나누었고,
세월은 흘러 거미는 이슬이 없는 생활을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거미는 이슬을 만져보고 싶었지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거미가 용기를 내어 “나 너를 한번 만져보고 싶어 응?”하고 말했습니다. 
 
이슬이 슬픈 표정으로 “너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럼 너 나에게 또 한 가지 약속을 해야해.
만약 내가 없어도 슬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거미는 “응!”하고 말했습니다.
거미가 두 손으로 이슬을 꼬옥 껴안는 순간 이슬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파견되었다는 의식을 갖지 않는 이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 자체로 도둑이기 때문입니다.
파견받았음을 잊으면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봉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 도둑이 됩니다.
주님께 봉헌하는 부모라야 참 목자요 주님께서 드나드는 문이 됩니다. 
 
우리는 참 목자에게 닫힌 문입니까, 열린 문입니까?
자신을 죽여 그리스도께서 통과하게 하지 않는 목자는 모두 닫힌 문입니다.
문은 마치 혈관처럼 자신이 커지면 닫힙니다.  
 
우리는 참 목자를 자신이 얼마나 목자에게 열린 문인지를 보며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이슬처럼 여기고 다시 하늘로 올려보내야 하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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