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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1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4-13 조회수 : 701

4월 13일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사도행전 2,14.22-33
마태오 28,8-15 
 
부활의 기쁨이 커지면 세상의 기쁨이 작아진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솔로몬 왕은 자신의 나라에 위대한 건축 기술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사신을 보내어 그 기술자를 성전건축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술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를 꺼렸습니다. 
그 이유는 그 기술자에겐 너무도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걱정하였던 것입니다.  
 
왕은 이번에 그 지역 영주에게 사신을 보내어 기술자를 설득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 지역 영주까지 부탁하자 기술자는 이 사실을 아내에게 털어놓았습니다.  
 
아내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목에 반지를 걸어주며 그 반지에 불이 붙지 않는 한 자신은 남편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기술자는 누구보다 성전을 짓는데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솔로몬 왕은 기술자를 만나 칭찬을 하던 중, 목에 걸린 반지의 이유를 물었습니다. 
기술자가 그것은 아내가 자신을 향한 사랑의 징표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솔로몬 왕은 장난기가 발동해 나라에서 가장 잘 생기고 똑똑한 청년 둘을 그 집에 보내어 아내를 유혹해보라고 하였습니다.  
 
두 청년을 맞은 기술자의 아내는 정중히 맞아주었고 잠자리까지 마련해주었습니다. 
두 청년이 밤에 아내를 유혹하기 위해 문을 열려고 하자 문이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기술자의 아내가 혹시 몰라서 문을 밖에서 잠가두었던 것입니다. 
 
이번엔 솔로몬 왕이 변장을 하고 직접 나서기로 합니다. 
그리고 기술자의 아내를 찾아가 하루 묵기를 청합니다. 
기술자의 아내는 솔로몬의 지혜와 기품에 자신을 유혹하러 온 그 사람이 임금임을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그에게 여러 개의 달걀을 삶아서 저녁으로 대접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달걀에는 각기 다른 색이 칠해져 있었습니다. 
 
기술자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금이시여, 색이 다른 달걀의 맛이 어떻습니까?”
“아니, 내가 임금임을 알고 있었군. 물론 맛은 다 똑같지.” 
 
“여자도 똑같습니다. 겉으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속은 다 똑같습니다. 
저는 임금께 속한 백성이라 모든 것은 임금께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천상의 지혜를 지닌 임금께서도 세상 모든 욕망은 헛된 것임을 아시리라 믿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장난이 지나쳤음을 사과하고 돌아와 기술자를 칭찬해주면서 다른 기술자들의 열 배에 해당하는 수고비를 주었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예화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이 세상의 기쁨과 반대입니다. 
그래서 천상의 기쁨을 얻은 이들은 세상의 기쁨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부활의 기쁨이 바로 천상의 기쁨 중 으뜸입니다. 
그 기쁨이 있다면 세상의 기쁨이 자신을 유혹하게 만드는 것은 반지에 불을 붙게 하기보다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기쁨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천사를 만나고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가는 여인들의 기쁨과, 천사를 만나 기절했다가 유다 지도자들에게 많은 돈을 받고 기뻐하며 거짓을 전하는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의 기쁨입니다.  
 
경비병들도 기쁩니다. 많은 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경비병들이 전하는 말을 더 믿습니다. 
마태오복음은 말합니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 
 
그러나 만약 부활의 기쁨을 가진 여인들에게 유다인들이 많은 돈을 주며 거짓말을 전하라고 한다면 여인들은 그 돈에 휘둘릴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부활의 기쁨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부활의 기쁨으로 세상의 기쁨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천국의 기쁨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기쁨이 침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기쁨을 원하는 사람들은 부활의 기쁨 역시 그들을 유혹할 수 없습니다. 
어떤 기쁨을 원하느냐에 따라 각자가 사는 세상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일반대학을 다니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갈등이 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제가 되는 행복이 있고, 세상에서 사는 행복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사는 행복은 어느 정도 맛보았지만, 사제가 된 행복은 추측으로만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제가 되는 행복을 택할 수 있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주님 은총의 결과인 것 같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사제가 되어서 세상의 행복을 조금씩 버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제로 사는 행복을 더 누리려면 세상의 행복을 더 버려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더 행복해지고 세상의 행복은 더 맛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참으로 부활을 체험하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세상의 행복을 색깔 다른 달걀들로 보이게 만듭니다. 
그게 그것입니다. 
 
여인들의 기쁨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습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기뻤고, 예수님을 만나 더 기뻤으며, 그 기쁨을 교회에 전함으로서 
더 기뻐졌습니다. 
이 기쁨이 세상의 행복을 잊게 했습니다.  
 
그러나 경비병들은 세상에서 받는 많은 돈의 행복은 느꼈겠지만,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는 이 두 기쁨 사이에 놓여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은 미지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기쁨을 이기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세상 모든 욕망이 그게 그것으로 보인다면 부활의 기쁨을 품은 사람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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