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7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용서도 거저 받았다고 믿어야 거저 내어줄 수 있다
맥스 루케이도의 『토비아스의 우물』 이야기입니다.
사막 한가운데 자리 잡은 마을 사람들은 물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물 주인 토비아스가 마을 사람들에게 물을 거저 주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토비아스는 아들과 함께 먼 길을 떠나며 하인에게 “누구에게든지 물을 거저 주라.”며 우물 관리를 맡겼습니다.
처음에 하인은 모든 사람에게 물을 주었지만, 얼마 있지 않아 자신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에게만 물을 주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자기에게 잘 보이는 사람에게만 물을 주었습니다.
주민들은 하인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물가에 주인의 아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하인을 꾸짖고 주민들에게 예전처럼 마음껏 물을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주민들은 나쁜 짓을 한 하인에게 물을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하인에게도 물을 주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라며 종을 용서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고 있지 못하다면, 내가 무엇을 받았는지 까맣게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악한 종이 됩니다.
물이 아버지의 것임을 알면 누구에게나 내어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처럼, 용서도 내가 무엇을 받았는지 깨닫게 되면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내어주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용서’라는 주제로 말씀하시는 중에 예수님께서 ‘일곱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일흔’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살기 위해 내려간 숫자가 ‘칠십’입니다.
또 ‘칠’은 성령을 통한 새로운 창조, 곧 신약에서는 ‘칠성사’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성사를 통해 새로 태어난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임금이 거저 탕감해준 빚인 ‘만 탈렌트’가 곧 ‘성사’인 것입니다.
성사의 원천은 그리스도의 옆구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로 새로 태어납니다.
그 피와 물이 교회에 맡겨졌고 교회는 그 피와 물을 성사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베풉니다.
우리는 특별히 세례-견진-성체성사를 통해 새로 태어났습니다.
새로 태어나면 새로운 본성을 갖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인성과 결합한 신성을 성체를 통해 우리에게 넣어주셔서 우리도 신성을
입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라고 말합니다.
이 신비는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몫을 선물로 받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만 탈렌트가 바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와 물이고, 우리가 새로 태어나기 위해 교회에서 받는 성사입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스페인인 아버지가 집을 나가 마드리드로 간 아들과 화해하기로 다짐을 합니다.
아버지는 뒤늦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엘리베랄’ 신문에 광고를 냅니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파코는 스페인에서 아주 흔한 이름입니다.
아버지가 약속 장소에 나가자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가 무려 800명이나 나와서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물을 나누어주어야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이렇게 많습니다.
내어주지 못하면 받지 않은 것입니다. 용서는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만 탈렌트, 곧 성사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어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반면 그렇게 받아놓고도 남을 미워한다면 그 믿지 못한 것 때문에 하느님 자녀의 자격을 잃게 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거저 용서하지 못한다면 거저 받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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