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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1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2-16 조회수 : 468

2월 16일 [연중 제6주일] 
  
​‘나’라는 시스템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큰 죄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해 유럽의 600만이나 되는 유태인들을 색출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수용소로 보내는데 나름대로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패전 후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숨어 살다가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됩니다.
유태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과정을 정리하여「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아렌트는 처음에 아이히만이 냉철한 게르만 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상상했지만 
실제로는 무척 왜소하고 기가 약해보이는 그냥 평범한 인물인 것에 놀랐습니다. 
 
재판 때 15개의 죄목으로 기소되었지만 그는 단 하나의 죄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책임을 지는 위치가 아니었고 따라서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저 하급 공무원으로서 출세를 위해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한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유태인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공무원으로서 나라에서 시키는 일은 최대한 열심히 수행한 죄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책의 부제를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 붙였습니다. 
‘어쩌면 누구도 그 시스템 안에서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부제에 들어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유죄를 선고받고 사형 판결을 받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한나 아렌트가 본 그의 가장 큰 죄는 바로 ‘악한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평범하게 열심히 살아도 사람은 항상 어떤 시스템 안에 속해 그것의 지배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스템이 악한 시스템인지 선한 시스템인지를 구별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가장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선원이 한 배에서 평생을 열심히 일했습니다. 
남이 꺼리는 일까지 도맡아 하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엔 경찰에 잡혀 사형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왜 평생 열심히 일했는데 사형을 받아야 했을까요? 
그 배가 해적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사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떤 시스템에서 살아가는 것일까요? 
내가 살아가는 이 시스템은 과연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이것에 대한 진지한 물음 없이 산다면 그 사람의 미래는 자칫 아돌피 아이히만처럼 
심판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의 종살이를 할 때 그들은 파라오에게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자신들은 열심히 산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파라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온 인물이 있었는데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파라오가 악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악한 시스템에서 종살이하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어떠한 시스템에서 해방시켜주러 오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지배당하는 어떠한 시스템이 악한 것임을 알려주러 오신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러 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그 시스템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입니다. 
모든 사람은 나 자신에게 봉사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 여기며 열심히 그 시스템을 따라 살아갑니다. 
 
저는 이 ‘나 자신’을 ‘자아(ego)’라 부르고 싶습니다. 
자아는 육체의 본성으로 사람을 자신 시스템 안에 복종시킵니다. 
육체의 본성은 ‘세속-육신-마귀’, 즉 ‘돈에 대한 욕구-쾌락에 대한 욕구-교만에 대한 욕구’입니다. 
이 욕구들을 따르면 사람은 나 자신만을 위하는 '나' 뿐인 사람, 즉 나쁜 놈이 됩니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구약에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모두 이 세 욕구와 반대됩니다. 
재물을 나누어야하고, 육체를 절제해야 하며, 겸손해지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것을 철저하게 따랐던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여전히 자아라는 시스템에 복종하면서도 행위로만 하느님 법에 순종하려 했던 것에 있습니다. 
 
분명 이런 율법들은 자신의 본성인 욕구를 없애기 위함이었는데 그 욕구에는 순종하면서 겉으로만 하느님 법을 따른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행위로 의로워지려 했지만, 여전히 자아의 욕망에 지배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의로움을 넘으려면 죄를 우리의 행위보다는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욕구에 두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행위가 아니라 욕구에 정조준 하도록 하십니다. 
다시 말해,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는 율법을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바꾸시고,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로 바꾸십니다. 
행위가 아니라 욕구가 죄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아의 욕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나의 자아의 정체가 뱀과 같음을 깨달아야합니다. 
하와가 뱀에게 넘어간 이유는 그 미소 뒤에 독을 감춘 뱀이 곧 자아임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나치독일의 정체를 몰라서 그 지경이 되었듯이 우리도 우리 자아의 정체를 모르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안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악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이제 주님의 목소리만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 시스템을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 순종하는 시스템으로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있습니다. 그는 늑대라는 본성과 욕구에 지배당합니다. 
어두운 곳을 좋아하고, 익히지 않은 살코기를 좋아하며, 네 발로 걷고, 옷은 찢어버립니다. 
이 욕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연습하면 될까요? 안 됩니다.  
 
자신이 인간임을 믿어야합니다. 
자신의 본성이 무엇이라고 믿는 그 믿음이 자신을 지배하는 시스템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나라고 믿으면 자아의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도 “나는 나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나라고 믿어야 하느님의 본성에 사로잡힙니다.  
 
하느님의 본성이란 사랑입니다. 
아기가 부모를 알아 자신도 인간임을 믿게 되었을 때 네 발로 걷고 싶은 본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아버지가 하느님임을 먼저 믿지 않으면 자아의 욕구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아버지를 하느님이라 믿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라 믿어야 하느님의 본성이 나와 지금의 본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나’라는 시스템을 분별없이 받아들여 그 욕구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말 나를 나로 여기며 사는 것이 결국엔 가장 큰 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라는 나를 버리고, 
“나는 나다!”라는 ‘나’를 
나의 나로 받아들여야합니다.  
 
나는 어떤 ‘나’라는 시스템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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