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9일 [연중 제3주간 수요일]
< 십자가의 의미를 알려줄 스승을 찾으려는 마음이 ‘들을 귀’다 >
폴란드의 조그만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웬일인지 독일군이 이 마을에는 나타나지 않아 불안한 가운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데
드디어 독일군이 나타났습니다.
일부는 마을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학교로 가 학생 중에 드문드문 섞여 있는 유태인 어린이들을 끌어내려고 하였습니다.
독일군의 모습을 본, 가슴에 별을 단 유태인 어린이들은 무서워서 선생님에게 달려가 매달렸습니다.
코르자크란 이름을 가진 선생님은 자기 앞으로 몰려온 유태인 어린이들을 두 팔로 꼭 안아 주었습니다.
트럭 한 대가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오자 아이들은 선생님의 팔에 더욱 매달렸습니다.
“무서워할 것 없단다. 하느님께 기도를 드린다면 마음이 좀 편해질 거야.”
독일군은 코르자크 선생님 곁에서 유태인 어린이들을 떼어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코르자크 선생님은 군인을 막아서며,
“가만 두시오. 나도 함께 가겠소!”라고 말했습니다.
“자, 우리함께 가자. 선생님이 같이 가면 무섭지 않지?”
“네, 선생님.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코르자크 선생님은 아이들을 따라 트럭에 올랐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독일군이 선생님을 끌어내리려 하자,
“어떻게 내가 가르치던 사랑하는 이 어린이들만 죽음으로 보낼 수 있단 말이오.”
하며 선생님도 아이들과 함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마침내 트레물렌카의 가스실 앞에 도착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손을 꼬옥 잡고 앞장서서 가스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자신은 유태인이 아닌데도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죽음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지식을 가르치는 스승이 있고 의미를 가르치는 스승이 있습니다.
코르자크 선생님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사랑과 죽음의 의미를 가르친 스승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아리송하게도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가 뭘까요?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유로만 말씀하시느냐는 열두 사도들의 질문에 이렇게 더 아리송한 대답을 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용서받지 못하게 비유로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분별하기 위해서입니다.
비유를 통해 들을 귀가 있는지, 없는지 분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들을 귀’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열두 사도만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여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제자들을 십자가의 희생으로 이끄십니다.
지식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의미를 알려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길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교만을 죽여야 하고, 돌밭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육체와 싸워야하며, 가시밭이 되지 않으려면 재물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모든 비유의 해석은 다 십자가로 연결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지식은 원했지만 십자가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참 스승으로부터 배울 ‘들을 귀’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성경공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삶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과 연결시키지 못하는 스승도 있습니다.
스승 없이 스스로 깨우치려고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영적인 눈을 가지지 못한 스승을 만나는 것도 문제입니다.
참다운 영적스승은 비유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발견하고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과 연결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에게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그리스도로 보이고 홍해를 건너는 것이 세례로 보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가 성체로 보이고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왔는데 그 생명의 물을 주시는 바위가 그리스도로 보였습니다(1코린 10,1-4 참조).
탈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신비로 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의 길로 이끌 스승을 찾으려는 마음이 ‘들을 귀’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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