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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1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2-10 조회수 : 741

12월 10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이사야 40,1-11
마태오 18,12-14 
 
<​ 나의 크기는 나의 사랑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와 같다 > 

로마 멸망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양합니다.
그런데 로마 제국이 멸망하게 된 출발점은 한 사건으로 귀결됩니다.  
 
서기 378년 한 로마 병사가 잘못 쏜 화살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고트족이 훈족에게 밀려 로마 접경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평화롭게 살 수만 있다면 로마인으로 사는 것도 받아들이려 하였습니다.  
 
동서로 나뉜 고트족 중 서고트족은 이미 로마 지배하에 있는 땅에 정착할 수 있는 약속을 받아놓는 상태였습니다.
동고트족 역시 같은 수순을 밟아가고 있었습니다.  
 
동고트족이 서고트족에서 도망친 이들을 포섭한 상태로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도 쓸데없는 전쟁은 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화평 회담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양측 기마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공격태세를 갖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로마 병사 한 명이 긴장한 나머지 화살 한 발을 고트족에 쏘았고 그 때문에 고트족 호위대가 이에 대항해 공격하였으며 이를 본 로마 기병대는 공격 진영을 갖춰 고트족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좌우 숲 속에 숨어있던 고트족 기병대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로마 군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됩니다.
고트족이 로마를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전투로만 4만 명의 로마 군인이 전사하게 되었고 로마 병력은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로마는 이 전투 이후로 두 번 다시 이탈리아 전역을 지배할 수 없었습니다.
[참조: ‘세계사를 바꾼 49가지 실수; 화살 하나가 바꾼 역사’, 빌 포셋, 생각정거장] 
 
세계를 호령했던 로마가 일개 병사 한 명의 잘못된 실수로 무너질 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들을 볼 때 세상에 가볍게 여길 사건이나, 무시해도 될 사람이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쉰들러 리스트’(1993)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1,100명의 유태인을 구하고 자신은 도망쳐야 하는 상황에서 한 유태인이 자신의 금니를 빼서 만든 반지를 쉰들러에게 감사의 표현으로 선물하는 장면이 나입니다.
그때 그 반지에 새겨진 탈무드의 명언이 이것입니다. 
 
“한 사람을 구함은 세상을 구함이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에서도 한 병사를 구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밀러 대위는 죽어가면서도 라이언 일병이 무사 귀환할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해합니다.
밀러 대위는 라이언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라이언 ... 값지게 살아 ... 값지게 ... ” 
 
값지게 살라는 말이 무엇일까요?
전투의 베테랑이었던 자신이 일개 병사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처럼 그렇게 가장 작은 사람들까지도 목숨을 내어줄 수 있게 살라는 말일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가 된 라이언이 밀러 대위의 무덤 앞에서 아내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여보, 나 부끄럽지 않게 살았지?
라이언 부인이 대답합니다.
“그럼요!” 
 
이 대답은 실제로 무덤 속에 있는 밀러 대위로부터 듣고 싶었던 이야기일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대답을 들어야합니다.
내가 값지게 살라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가장 보잘 것 없는 우리 각자를 위해 피를 흘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의 아주 작은 사람들을 위해 피를 흘려야합니다.
그래야 마지막 때에 “저 부끄럽지 않게 살았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 최고 부자인 손정희 회장도 병중에서 죽음 직전에 있을 때 자신의 딸과 같은 저 멀리의 한 아이를 웃게 해 주고 싶은 소망을 찾습니다.
그리고는 건강이 회복되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갓 태어난 자신의 딸만 잘 살게 해 주고 싶었다면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저 먼 세상의 굶고 있는 아이에게까지 퍼져갔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가 확장되니 하느님께서 그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입니다.
이 복음이 루카복음에도 나오는데 그 쓰임새가 다릅니다.  
 
루카복음의 99마리 양은 결국 버려져야 할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복음에서는 99마리의 양을 ‘광야’에 내버려둡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99마리의 양을 ‘산’에 둡니다.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99마리 양을 주님께로 이끌었다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 양이라도 더 찾아내 꼭 데려오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왜 크신 분이실까요?
세상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심지어 가리옷 유다와 같이 마귀가 다 되어버린 인간까지
사랑하여 구해주시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 존재의 크기는 그 사랑이 도달하는 거리와 같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디까지 퍼져나갑니까?
나 자신입니까, 가족입니까, 친구들입니까, 나라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작은 피조물들까지입니까?  
 
어디까지 나를 확장하느냐에 따라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살기도 하고, 작은 사람으로 살기도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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