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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1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1-13 조회수 : 566
11월 13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지혜서 6,1-11
루카 17,11-19 
 
<​ 믿음의 크기와 찬양의 크기는 비례한다 > 

저는 다행히도 여러 나라의 미사 전례에 참석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미사 안에서 찬미 소리의 정도와 그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수가 비례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은 독일의 한 성당의 평일미사에 참석하였습니다.
뒤쪽의 2층 성가대석에서 정말 아름다운 성가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성가를 부르는 이들은 딱 들어도 프로였습니다.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걸출한 음악가들이
이런 분위기 때문에 탄생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미사 참례자 수는 10명이 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광경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미사 참례자들은 미사 내내 성가를 하나도 따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화음 속에 자신의 목소리를 끼어 넣을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미사가 아니라 콘서트였고 그 콘서트장에 몇 명의 노인들이 참석하여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미사도 이와 비슷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례는 더 경직되고 그와 발맞추어 신자들은 덜 나옵니다.  
 
성가대는 신자들이 따라 부를 수 없는 특송을 많이 부르고 신자들은 마치 성가대가 대신 찬미해 주는 것처럼 앉아있습니다. 
 
평화의 인사를 할 때도 형식적입니다.
그냥 옆 사람과 고개만 살짝 숙이며 눈인사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셨을 때 그렇게 눈인사만 살짝 하였을까요?
서로 기쁨에 끌어안고 함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요? 
 
전례의 생동감은 믿음에서 오는데 그 믿음은 소리 높은 찬미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들이 소리 높여 찬미하지 않으면 그 전례는 죽어가는 것입니다.
소리 높여 찬미 할 수 없는 이유는 구원받은 것에 대한 기쁨이 샘솟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이 다시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복음은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지는 전례에 절대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인의 전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전례에 참석하지 않더라도 기쁘게 찬미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구원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마르코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가시다가 먼저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으로 들어가 성전의 장사꾼들을 모두 쫓아내신 다음, 다시 돌아오는 길에 무화과나무가 바싹 말라 죽어버린 것을 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문단의 구조가 마치 샌드위치처럼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하고 강도들의 소굴로 변해버린 것을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감싸고 있는 형식입니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믿음이 없는 전례는 결국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말라버릴 것이란 예수님의 경고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말씀도 바로 참다운 예배는 어때야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온” 사마리아 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이 있다면 받은 것에 감사해서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사는 이전부터 ‘에우카리스티아’, 즉 ‘감사’로 불렸습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구원되었다는 믿음 때문에 생기는 감정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있다면 감사의 찬미가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창피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나병이 치유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영원한 생명을 얻어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치유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찬미소리가 저 사마리아인보다 적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참례한 미사 중 가장 길었던 것은 6시간입니다.
피정 때였기 때문에 가능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6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찬미를 하며 처음으로 눈물을 흘려보았고 평화의 인사를 하며 함께 미사에 참례한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임을 느꼈습니다.
그 가슴 뜨거움은 꽤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뜨거운 찬양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돌아와 큰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한 사마리아 사람만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전례가 과연 구원받은 기쁨에 성당이 떠나가라 찬양하고 춤을 추는 시간인지, 아니면 의무이기 때문에 참아내야 하는 무엇인지 되돌아볼 때인 것 같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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