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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2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0-26 조회수 : 577

10월 26일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 열매 맺지 못하는 이유 > 

우리가 고해성사 하는 것을 가만히 되짚어보면 예전에 했던 것들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미워했던 것, 아이와 남편에게 화를 냈던 것, 직장상사나 누군가를 안 좋게 말했던 것, 게을렀던 것,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것, 
또 과음하고 늦게야 귀가한 것 등 누구든 각자 했던 고해를 또 하는 것들이 한두 가지씩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을 허락하는 이유는 그런 것들을 고치고 당신 나라로 오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애벌레는 각자 크기가 다릅니다. 
그 크기에 따라 누에가 되고 누에에서 나오는 나비도 애벌레 때의 크기와 비례하게 됩니다.  
 
잘 성장했던 애벌레는 큰 나비가 될 것이고 잘 못 먹어 작을 때 누에가 된 것들은 나비가 되어도 작을 것입니다. 

한 번 정해진 이 크기는 하느님나라에서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도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있는데 하느님은 우리들이 최대한 커진 상태로 하늘나라에 들어오라고 우리에게 더 클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회개의 시간을 그냥 흘려버리고 있다면, 혹은 더 클 수 없을 정도로 커버렸다면 
하느님은 그 사람을 세상에 놓아둘 의미가 없어집니다.  
 
농사를 지을 때 누가 설익은 포도를 따겠습니까? 혹은 너무 익어 먹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을 수확하겠습니까? 

어떤 누가 죽는다면 이미 익을 만큼 익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더 이상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를 잘라버리려고 할 때 포도 지배인은 한 해만 더 기다려 달라고 청합니다.  
 
그래도 열매 맺지 못하면 주인의 명에 따라 영양분을 낭비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가 안 되고, 일찍 일어나고 싶어도 잘되지 않으며, 술을 절제하고 싶어도 절제가 안 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회개란 이런 우리의 부족함을 변화시켜 가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내 삶을 변화시키겠다는 결심과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결국 하느님은 결심이 선 사람은 언제나 도와주시기 때문에 내가 변화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정적으로는 내가 변화되기 위한 결심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용서가 안 되는 것은 내가 용서를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죄가 있어서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는 끝까지 그 사람을 판단하고 용서해서는 안 되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용서해야 되는데, 용서해야 되는데...’라고 말하는 것은 용서해야 되는 것을 알지만 잘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니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성모님, 성인들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 주위에는 용서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을 용서한 예가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유영철에게 자신의 노모와 아내, 4대 독자까지 살해당했지만 그를 용서하며 그의 사형을 반대하는 고정원씨만 보더라도 우리가 원해서 안 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내가 하기를 원치 않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하기 싫어하는 것들을 잘 안 된다는 핑계로 미루고만 있다면 하느님도 이렇게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계속 영양분을 공급해 주시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회개하기 위한 결심을 멈추는 순간, 하느님도 낫을 들어 수확할 결심을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몇 년 만에 대학 동창들을 만났습니다. 
모두들 아이들 키우며 직장 다니며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서로 바빠서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만나자고 하니 외국에 있는 친구들 빼고는 모두들 바쁜 와중에도 다 나와 주었습니다.  
 
대학 다닐 때는 저만 성호 긋고 밥을 먹는 것이 친구들 사이에서 창피하기도 했지만, 막상 사제가 되니 그들도 저를 함부로 부르지 않고 사제를 인정해 주면서도 오히려 친구 중에 사제가 한 명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불가에서 말하는 대결정심인 것 같습니다. 
회개를 위해 큰 결심을 하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란 생각 때문에 변화되기를 두려워하지만, 내가 완전히 변화되어 버리면 주위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고 맞춰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제자들은 두려워하였고 결국 그 순간이 오니 모두들 도망쳐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대결정심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그랬더니 결국 당신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을 따라 모두 순교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내가 변하여 온 세상을 변하게 만들 수 있는 회개가 참 회개이고 그 회개를 위해서는 대결정심을 지녀야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은 길거리에서도 기도 시간만 되면 무엇이든 깔아놓고 메카를 향해 절을 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들은 삼종기도 시간에 그렇게 합니까?  
 
주위 눈치를 보면서 하지 않거나 아니면 혼자 조용히 숨어서 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우리들 모두가 회개하지 않으면 그 때가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심판관으로 내려오실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온 세상을 바꾸어 나갈 믿음과 결심으로 끊임없이 회개해 나가야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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