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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1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0-13 조회수 : 587

10월 13일 [연중 제28주일] 
 
열왕기 하권 5,14-17
티모테오 2서 2,8-13
루카 17,11-19 
 
<​ 감사 없는 청원은 청원이 아니라 강탈이다 > 

코리는 폴란드의 한 아름다운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독일 나치에 의해 나라가 정복되자 유태인을 숨겨준 죄목으로 온 가족이 포로수용소에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코리는 언니 벳시와 함께 감금되어 온갖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어려움은 성경 말씀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신체검사를 받는 도중 한 그리스도인 간호원이 코리에게 “가장 갖고 싶은 것을 말씀하세요.”라고 속삭였고, 코리는 그 간호원을 통해 작은 성경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코리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코리는 들키지 않게 갖은 애를 써가며 성경 말씀을 삼키듯이 읽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 가 너무도 소중한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어느날 코리는 테살로니카전서 5,18절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코리는 그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겼습니다. 
 
그런지 얼마 안 되어 코리는 언니 벳시와 함께 감방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옮겨진 감방으로 오자 코리는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마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도 비참한 곳에 있었지만 이곳은 더욱 비참했습니다. 
게다가 벼룩까지 들끓어서 견딜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지만 코리는 도저히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니 벳시가 눈을 감고 나즈막하게 기도드렸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벼룩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할 수 없이 코리는 “아멘!”했습니다. 
 
얼마 안가서 코리는 벼룩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할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벼룩 때문에 그 감방 주위에는 간수도, 독일 군인도 얼씬 하지 않았고 그들은 자유롭게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덕에 코리와 벳시는 매일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나누게 되었습니다. 
온종일 강제 중노동에 시달리고 굶주린 여인들과 함께 모여 서로를 위로하며 아픈 곳을 만져주고 양보하며 기도하는 놀라운 그리스도인의 친교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벼룩 때문에 가능했음을 코리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일까요? 
그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믿어야하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고작 선악과 몇 개 따먹은 것인데도 야단맞을까봐 몸을 숨겨야했습니다. 
나에게서 몸을 숨기는 사람과 어떻게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지겠습니까?  
 
타인에 대한 자비를 믿지 않으면 타인은 지옥이 됩니다. 
당신을 지옥처럼 생각하는 아담과 하와를 계속 에덴동산에 머물게 하실 수는 없으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게 만든 대상은 바로 내 안의 ‘자아’입니다. 
그것이 뱀으로 상징됩니다. 
뱀은 자신들이 받은 것보다는 결핍에 시선을 돌리게 만듭니다. 
그래야 자신이 사람을 이용해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아의 불만 때문에 자아의 종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감소시키기 위해 이웃을 판단하고 미워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표징은 무엇일까요? 
불만과는 반대로 ‘감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10명이 주님께 나병을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다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외국인만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0명을 다 고쳐주셨다는 말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은혜를 이미 다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감사만 하면 됩니다. 
감사가 곧 이미 많은 것을 받았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성당에 나오는 신자들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감사하러 나오는 사람들과 청하러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청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목적은 감사하기 위한 것이어야 입니다. 
감사하면 이미 받았다고 믿는 것이기에 사실 하느님께서 청하지 않는 것까지도 
다 알아서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려주실 때 아버지께 이렇게 청하십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1,41-42) 
 
예수님은 청할 때 감사기도를 드리십니다. 
이미 청한 것을 받았다고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청한 것을 받으면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청은 거의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며 무언가 청한다면 “무자비한 분이시지만 내 청 좀 들어주세요. 
만약 들어주시면 당신이 자비하신 분이라고 인정해줄게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잘 들어두어라.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마르 11,24)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실 때도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고, 빵과 포도주를 당신 살과 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위해서도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감사가 믿음을 보증하는 것이기에 감사가 없는 청원은 오히려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감사했다면 선악과를 따먹었을까요?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감사하지 못하면 하느님께서 자비롭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어른이 아이에게 귤을 하나 주었습니다. 
그 아저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지 못하니 어머니가 당황하며 아이를 야단쳤습니다. 
 
“엄마가 그런 거 받으면 주신 분께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어? 어?”
그러자 아이는 이제 깨달았다는 듯이 다시 귤을 아저씨에게 내밀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까주세요!” 
 
감사 없는 청원은 청원이 아니라 강탈입니다. 
이미 받은 것에 대해 먼저 감사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받은 것도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미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면 주신 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서 또 달라고 하는 것이니 강탈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미합시다. 
그러면 나의 부족한 부분은 생각만 해도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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