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8일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즈카르야 2,5-9.14-15ㄷ
루카 9,43ㄴ-45
< 깨달음과 도달함의 사이에 있는 십자가 >
보조국사 지눌과 그 누이의 이야기입니다.
지눌의 누이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부처님처럼 훌륭한 동생이 있으니,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거야.
동생이 나를 위해 열심히 기도할 테니까.’
지눌의 누이는 지눌이 열심히 불공을 닦아야 한다고 권고하는 것을 무시하였습니다.
누이는 아랫마을에 살면서 지눌에게 반찬과 음식을 자주 갖다 주곤 했습니다.
어느 날,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누이가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지눌은 누이를 한 번 흘깃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없이 혼자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자기에게 먹어 보라는 말도 없이 혼자 먹기만 하는 동생을 보고 누이는 은근히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동생, 아무리 배고 고파도 그렇지. 내게 먹어 보라는 말도 없이 혼자서 먹는 법이 어디 있어?”
“왜요? 동생이 배부르게 먹으면 누님도 저절로 배부르지 않습니까?”
“이 사람아, 자네가 먹는데 왜 내 배가 불러?”
지눌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누님께서는 항상 동생인 제가 부처님 같으니, 그 불법의 힘이 누님에게도 저절로 미친다고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제야 지눌의 누이도 불도를 열심히 닦기 시작했습니다.
지눌이 활동할 당시 불교는 선종과 교종의 갈등이 심각한 지경이었습니다.
선종은 깨달음을 중시하고 교종은 배우는 것을 중시합니다.
가톨릭종교로 말하자면 선종은 교회 내에 성령의 감도로 내려오는 진리인 ‘성전(聖傳)’을 말하고, 교종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기록인 ‘성경(聖經)’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불경을 통해 배우려는 종파가 교종입니다.
반면 석가모니가 연꽃을 들고 미소를 지었을 때 그 의미를 깨닫고 미소로 화답한 가섭의 예처럼, 설명할 수 없는 부처의 마음을 깨달으려는 것이 선종인 것입니다.
선종은 교종이 글자에 얽매인다고 비판했고,
교종은 선종이 무식하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실제로 선종에서는 누구나 깨달음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어 일부 승려들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면서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반면 교종 승려들은 정치에 관여하며 무신들을 차별대우하여 발생한 ‘무신의 난’이 발생하는 데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지눌은 이 혼란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정혜쌍수’의 논리를 펼쳤습니다.
‘정’은 선종의 수행법을 말하고, ‘혜’는 지혜를 뜻하여 교종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마음(선종)과 말씀(교종)의 가르침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수행 방법으로 ‘돈오점수’를 주장하였는데, ‘돈오’는 선종의 깨달음이고, 그 깨달았다면 ‘점수’, 즉 조금씩 그 깨달은 곳에 다다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종의 깨달음만으로는 부족하고 교종의 도움으로 그 깨달은 곳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마치 어두운 밤에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이 번개가 번쩍 치는 것을 보고 나아갈 길을 확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길을 보았다고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닙니다.
깨달았어도 그 길에 도달하기 위해 계속 수행해야 합니다.
보조국사 지눌의 깨달은 모습을 보았다고 해서 그 누이가 보조국사 지눌이 된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교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알려주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모두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자칫 그리스도를 참 하느님이로 고백했다고 할 것을 다 했다고 믿으면 선종만 주장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깨달았다면 말씀을 통해 배우고 익혀 내가 그리스도가 되어가는 과정을 거쳐야합니다.
계속 이어지는 복음 안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 고백합니다.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신앙고백이 끝이 아니고 십자가가 남았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참으로 자신이 도달한 신앙을 증명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제로 십자가가 다가왔을 때 도망치게 됩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선종과 같습니다.
교리를 배웠다고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성경을 통해 그 배운 교리를 나의 것으로 체득하여 내가 변해가는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길을 보았으면 더듬어 가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노력이 안 되기 때문에 성체성사의 감동은 줄어들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까지 잊고 심지어 사랑하라는 유일한 계명을 어기고 이웃을 판단하고 미워하기까지 되는 것입니다.
안다고 구원되지 않습니다.
알면 그것이 나의 것이 되도록 체득하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배부르다고 우리 배까지 부르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처럼 먹고 마시고 행동해야 그리스도가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