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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2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9-26 조회수 : 599

9월 26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하까이 1,1-8
루카 9,7-9 
 
< 호기심과 신앙의 차이 > 

가난을 미덕으로 삼던 수도원의 재정이 바닥났습니다.
수도원 기물은 낡고 끼니를 잇기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젖소를 먹이는 목동이었던 고셰 수사는 약초를 이용하여 술을 들게 됩니다.
그가 만든 ‘불로 장생주’가 날개 돋친 듯 팔리자, 수도원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고셰는 그 공로로 사제 서품을 받게 되나 계속하여 술을 만들며 시음하므로 알코올 중독자가 됩니다.  
 
고셰는 미사 중에 술주정을 하여 귀신들렸다는 말을 듣고 감금되어 술만 제조하게 됩니다.
고셰는 젖소만 키우게 해달라고 애원하나 거절당합니다. 
 
저녁 미사가 끝날 때마다 수사들은 고셰의 영혼을 위하여 함께 기도를 드리자고 합니다.
그 시간에 술 만드는 낡은 건물에서 술에 취한 고셰의 슬픈 노래와 고함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때 수사들은 염려하며 말합니다. 
 
“이를 어쩌나! 신자들이 알면 큰일인데….” 
 
이것은 알퐁스 도테의 단편 ‘고셰 신부의 불로 장생주’의 줄거리입니다.
누구도 이 소설에 나오는 수도회 신부, 수사들이 사랑 가득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으로 고셰 신부를 위해 기도를 드려주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고셰의 피를 빨아먹는 모기와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와 비슷한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헤로데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피리를 불어주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함께 울어주지 않는 완고한 마음의 사람도 많은데 그래도 예수님께 관심이 있으니 얼마나 기특합니까?
그러나 그저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만나려는 사람들이 더 나쁩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며 예수님을 궁금해 했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께 믿음이 있어서 만나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자기만족을 위해 만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만약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요한처럼 또 목을 벨 준비가 되어있는 인간이었습니다.
호기심과 신앙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호기심은 자기만족을 위해 예수님을 만나려는 것이고, 신앙은 예수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처음 아버지에게 다가가게 만든 것은 ‘나에게 유산을 주실까, 안 주실까?’하는 호기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회개를 하고 아버지께 돌아갈 때는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라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어떤 일을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헤로데는 오로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 생각하고 예수님께 무엇을 해 드리고 싶은지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신앙인이 아니고 모기였습니다. 
 
영화 ‘기생충’엔 학력과 경력을 위조해서 한 가족이 모두 부잣집에서 일자리를 얻는 내용이 나옵니다.
학력은 그저 공부 방법만 잘 알면 잘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나 동료와 협업하여 성과를 이루어내는 능력은 또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사람을 뽑을 때도 이젠 학력이나 스펙만을 보지 않습니다.  
 
스펙만 보다가는 회사를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단물만 빨아먹는 기생충과 같은 사원을 뽑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사는 입사하는 사람에게 회사를 위해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부터 묻습니다. 
 
만약 이 회사에 왜 들어오려고 하느냐고 묻는 질문에 “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대답하면 바로 낙제입니다.
그 사람의 꿈을 위해 회사가 희생되도록 내버려 둘 사장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 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께 다가오는 이들을 다 받아들이지는 않으십니다.
하느님도 이용당하시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십니다.  
 
만약 우리도 성당에 나올 때 ‘하느님은 나에게 무엇을 해 주실 수 있을까?’ 만을 생각한다면
이는 신앙이 아니라 그냥 헤로데와 같이  
 
하느님을 이용하러 나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미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셨습니다.
‘다’ 주셨습니다.
더 이상 주실 것이 없으십니다.  
 
이젠 우리가 그분께 무엇을 해 드릴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할 차례입니다.
그래야 하느님을 이용하는 거짓 신앙인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보답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면서부터 참 신앙인이 됩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주님께 어떻게 보답해드려야 하는지 묻기 위해
하느님께 다가갑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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