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5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에즈라기 9,5-9
루카 9,1-6
< 진정으로 사랑하면 더 떠나기 쉽다 >
한때 ‘사귈 때는 열정적’으로, ‘헤어질 때는 미련 없이’라는 뜻의 ‘쿨한 이별’이 ‘사랑의 풍속도’처럼 여겨졌었습니다.
하지만 ‘쿨한 이별’은 이제 옛말입니다.
대신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결별은 죽음이다”, “이별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합니다.
여성들 사이에서는 안전하게 헤어질 수 있는 ‘안전 이별’이 화두입니다.
이별 살인의 가해자는 대부분 상대 남성, 피해자는 상대 여성입니다.
가해자 남성들은 상대에 대한 끝없는 의심과 소유욕, 일상생활 통제, 병적인 집착 그리고 무조건적인 증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살던 김아무개씨(32)도 이별 살인의 희생자입니다.
김씨는 2016년 4월19일 아침 출근하려고 현관문을 나섰다가 기다리고 있던 전 남자친구
한아무개씨(32)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도구들로 미루어볼 때 범행을 철저히 준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씨에게 한씨와의 만남은 악몽의 연속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다정다감하게 대하는 듯했지만 점점 집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를 가면 간다고 꼭 알려줘야 했고,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지 않으면 화를 냈습니다.
김씨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점점 다툼이 잦아졌고, 급기야 사귄 지 8개월 정도 됐을 때 김씨가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한씨는 “함께 죽자”, “죽여버리겠다”며 이별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협박과 잔혹한 스토킹이 시작되고. 쉴 새 없이 문자와 협박전화를 했습니다.
매일 김씨가 사는 아파트 앞에 나타났습니다.
보란 듯이 집 앞에 차를 세워두고 멀리서 지켜봤고, 아파트 맞은편 교회에 올라가
집 안을 수시로 들여다봤습니다.
그러다 결국 살인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한씨의 성장 과정을 보면 어릴 적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면서 사춘기 시절을 외톨이처럼 보냈습니다.
그는 범행 뒤에도 죄책감을 느끼거나 반성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별 살인’의 예방에는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가해자 스스로 범행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피해자가 피해 다닐수록 더욱 집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법원에서 ‘접근 금지’ 조치를 내려도 살인으로 이어지면 무용지물입니다.
그러다 보니 살인으로 이어진 다음에야 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참조: ‘이별살인, 그들은 왜 살인자가 됐나’, 정락인, 시사저널 1562호]
사랑의 원천은 두 군데입니다.
자신과 하느님입니다.
자신이 선택해서 하는 사랑이 있고 하느님이 맺어주셨다고 믿는 사랑입니다.
내 생각을 믿는 사랑이 있고 하느님 뜻에 맡기는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헤어져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두 다른 사랑의 결말은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쳐주는 힘을 주시며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성령을 부어주시며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가 가져야할 유일한 힘은 ‘성령’뿐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불을 끄는 유일한 힘은 육체의 욕망입니다.
성령의 힘이 불이라면 육체의 힘은 물입니다.
성령의 불은 육체의 집착에 의해 꺼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고 하십니다.
세상 것에 대한 집착 중에 가장 끊기 힘든 것이 인간에 대한 애정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는 계속 움직여야하기 때문에 사람이나 재물에 집착하여서는 안 됩니다.
한 가닥 실에 발 하나만 묶여도 새는 날 수 없습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파견 받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야만 할 때는 마음이 아픕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랑할수록 더 쉽게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데 어떻게 쉽게 떨어질 수 있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참 사랑의 기반은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떨어지기 싫어서 죽고 못 산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육체적 집착입니다.
사랑의 주체가 하느님이 아니라 내 자신이기 때문에 떨어지기 싫은 것입니다.
이 육체적 집착으로부터 대부분의 죄가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사랑을 분별해서 하기 때문에 좋은 사람만 좋아하고 싫은 사람은 싫어합니다.
일단 이별을 통보받으면 자신이 죽던지 상대를 죽이던지 합니다.
자신의 감정이 틀렸다는 것을 죽기보다 인정하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느님의 뜻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사랑이 소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야 할 때도 하느님 뜻에 우선권을 둡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으로 떠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려면 사랑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해야 합니다.
가끔은 이런 사랑이 냉정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도 떠나보낼 때는 과감히 떠나보내십니다.
그래서 지옥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일 자녀가 누구와 사랑하고 있다면 그 대상이 사랑의 힘을 자기 자신에 두는지, 하느님의 뜻에 두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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