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4일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에즈라기 6,7-8.12ㄴ.14-20
루카 8,19-21
< 말씀의 내용은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다 >
사막을 오가며 장사하는 한 아라비아 상인이 어느 날 실수로 잘못 든 길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길은 사막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이기도 했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한 상인은 몹시 기뻤습니다.
그러나 오아시스가 있는 지름길을 알아냈다는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오가며 오아시스를 이용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물이 말라붙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 후부터 이 상인은 혼자서만 그 길로 사막을 횡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한테는 일절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아시스 옆에는 키 큰 야자수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그늘 아래서 사막 횡단에 지친 다리를 쉬어 가기도 하던 상인은 하루는 문득 불안한 생각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했습니다.
‘이 나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오아시스를 발견하게 되면 어떡하지?
게다가 이 커다란 야자수의 뿌리가 어느 날엔가는 귀한 샘물을 다 빨아들여 버릴지도 몰라.’
오래 생각을 거듭하던 상인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야자수를 없애 버리기로 한 것입니다.
결국 상인은 야자수를 잘라 버리고 나서야 마음 놓고 길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며칠 뒤 장사를 끝내고 돌아오다가 오아시스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다만 나무 그늘을 잃어 바싹 말라버린 오아시스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예화라고 합니다.
어쩌면 오아시스와 야자수는 하나입니다.
물이 있으니 나무가 자라는 것이고 나무가 자라니 물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물을 나누기 싫어서 야자수를 자르면 물도 말라버립니다.
이것이 말씀을 듣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의 관계와 같습니다.
오늘 복음도 역시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와 연관해서 이해해야합니다.
씨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열매를 맺어야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면 말씀이 마치 길이나 돌밭이나 가시밭에 뿌려진 것처럼 내 안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열매를 맺으려면 말씀을 듣고 그것을 이웃에게 전해야합니다.
아니면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놓거나 침상 밑에 놓는 것과 같습니다.
내 안에 말씀이 떨어졌다면 선포되고 있어야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그러므로 말씀을 선포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말씀을 전하고 계신 예수님을 가족들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말씀을 들으면 실행에 옮겨야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실행이 별개가 아닙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이 곧 복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내용은 복음을 전하라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전하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말씀을 듣고 전하지 않으면 들은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매일 내 마음 속에 말씀이 뿌려지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열매 맺게 하려면 전해야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할 때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
라고 하셨습니다.
양식은 먹는 것이기도 하고 내어주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말씀을 받는 것도 양식이고 전하는 것도 양식입니다.
말씀을 먹는 것과 말씀은 전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듣지 않으면 전할 수 없고, 전해야 하는데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전하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가족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