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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9-09 조회수 : 639

9월 9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콜로새 1,24―2,3
루카 6,6-11 
 
< ​어디까지 생각해야하는가? > 

우리나라에서 국제기구 수장을 처음 맡은 사람은 반기문 UN 총장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보다 더 빨리 가장 유력한 UN 총장이 있었는데, 당시 세계보건기구(WHO) 총장을 맡고 있었던 이종욱 사무총장이 있었습니다.  
 
2006년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거의 확실하게 UN 사무총장에도
당선되었을 인물입니다. 
 
그분이 가톨릭교회와도 관련이 있는 것은 의학 공부를 할 때 의왕의 라자로 마을에서 나병환자들을 돌본 첫 번째 의사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일본 천주교 봉사자인 레이코 여사를 만나 결혼을 합니다. 
 
그분은 레이코 여사와 함께 남태평양 작은 섬나라인 사모아로 건너가 역시 한센병 치료를 위해 전력투구합니다.
그 곳에서 얻은 별명이 “아시아의 슈바이처”였습니다.  
 
그는 23년간 세계 보건기구에서 활동하면서 서태평양 지역의 소아마비 발생률을
현저하게 줄이는 백신을 개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덕에 “백신의 황제”라는 칭호까지 얻게 됩니다. 
 
2003년 WHO 사무총장으로 당선되며 자신이 숭고한 사상이 있어서 이곳에 들어왔던 것이 아니고 그저 여러 가지 조건이 좋아서였다고 털어놨습니다.
그는 숭고한 사상대신 ‘행동’을 선택했습니다.
옳다고 생각되면 무조건 행동하는 것입니다. 
 
일 년 중 150일 출장 30만 km의 비행을 하였는데,
“우리가 쓰는 돈은 가난한 나라 분담금도 섞여 있습니다. 그 돈으로 호강할 수는 없습니다.” 라고 말하며 이전의 총장들과는 다르게 항상 이코노미 이등석 좌석을 이용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행동하는 사람(man of action)”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성은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옳은지 결정하는 데까지만 사용되었습니다. 
 
그가 취임과 함께 내건 공약은 2년 내로 3백만 명의 에이즈 환자에게 치료제를 보급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직원들은 현 예산으로는 불가능한 공약이라고 우려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안된다고 생각하면 수많은 이유가 있고, 그럴듯한 핑계가 생기지.
우리는 이 일이 과연 옳은 일이고 인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인지에 대해서만 고민하면 돼.” 
 
하지만 우려했던 대로 백만 명에게밖에 백신을 공급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때 또 이렇게 말합니다. 
 
“적어도 실패는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훨씬 큰 결과를 남기는 법이야.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거야.” 
 
그는 아내에게 아주 작은 아파트 한 채만 남겨주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빌게이츠도 그의 이름만 듣고 선뜻 얼마든 지원하겠다고 했듯, 그는 지금도 매우 존경받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참조: ‘Man of action’, EBS 지식채널, 유튜브] 
 
 
현대는 생각중독에 빠져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기 위한 생각이 아니라 왜 옳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지에 대한 핑계를 찾는 것에 생각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서 하느님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원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이종욱 총장은 생각을 어디까지 쓰면 되는지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판단이 되면 더 이상 생각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행동만 필요할 뿐입니다.
더 이상의 생각은 이제 그 옳은 일을 하지 않게 만드는 핑계를 양산하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면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회당 한 가운데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그를 일어나 가운데 서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그러나 그들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을 치유해주십니다. 
 
그들도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해야 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쯤은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이 거기에서 멈춘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니 옳고 그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옳으면 그냥 행동하는 분이셨습니다.
더 이상의 생각은 없으셨습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죽임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생각이 좋은 데 쓰일 수도 있고 나쁜 데 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나쁜 데 쓰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더 이상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와는 뱀과 계속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계속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악과를 따먹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해지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옳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아무 생각 없이 바로 행동에 돌입하는 연습이 필요할 것입니다.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안 이후의 생각은 다 악한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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