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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8-07 조회수 : 568
8월 7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민수기 13,1-2.25―14,1.26-30.34-35
마태오 15,21-28 
 
< 발끈하지 않으려면 > 

시골에서 홀로 사시는 어머니를 뵈러 밤늦게 아내와 두 아들을 트럭에 태우고 달리던 중 음주 차량에 큰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아내는 목이 뒤로 꺾이며 간신히 생명은 건졌지만 전신마비가 됩니다. 
사고를 일으킨 운전자는 무보험자였습니다.
치료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처가가 나섰지만 처가도 파산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아내를 트럭에 싣고 호떡 장사를 시작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환경미화원에 지원하여 젊은이들을 제치고 1등으로 취직합니다. 
하지만 새벽부터 출근해야 하는 직업인지라 아내가 문제였습니다.  
 
정부가 지원해주는 간병인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래도 힘들었습니다.
아내는 매우 깔끔한 성격이었습니다. 
침대에 누워서 시시콜콜 잔소리를 해댔습니다. 
설거지를 해놓으면 “좀더 깨끗하게 해라”, 바닥 청소를 해놓으면 “다시 해라”라는 식으로 간섭했습니다. 
 
“시집살이가 따로 없었지요. 
너무 힘들고 지칠 땐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러나 그는 20년 넘게 매일 꿋꿋하게 아내의 얼굴을 닦아주고, 양치질을 시켜주고, 목욕시켜주고, 밥을 먹여주고, 잔심부름을 해주며 아내를 잘 돌보고 있습니다. 
 
강연 100°C에 나와 전신마비 아내를 돌보는 이야기를 한 김동덕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의 그런 참을성은 어디서 나올까요? 
그의 강연 제목은 “나와 아내와 당나귀”입니다. 
자신과 아내만이 아니라 당나귀를 제목에 넣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내에게 온유하게 대할 수 있었던 힘이 바로 ‘당나귀’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산골에서 살았고, 어머니는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종일 일하러 나가셨기 때문에 친구가 없었습니다. 
그가 대화하고 놀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동물들이었습니다.
커서도 힘들고 어려울 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선택한 동물이 당나귀였습니다.  
 
가격도 싸고 키우기도 쉬워서 새끼 당나귀 두 마리를 분양받았습니다. 
처음엔 말을 잘 안 들어 애를 먹었지만, 자주 쓰다듬어주고 사랑을 베풀자 사람처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내 병수발에 몸과 마음이 지칠 때면 당나귀들을 찾아가 하소연하였습니다.
“제가 ‘얘들아~’ 하고 부르면 당나귀들이 제게로 달려와요. 
그리고 제 말에 귀를 기울여주죠. 
제 말을 듣고 정말 이해한다는 듯이 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해요. 하하하.”
그가 20년간 아내에게 그렇게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당나귀라는 돌파구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혼자 힘만으로는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께 은총을 청합니다. 
딸이 마귀가 들려 고생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경우와는 다르게 그 여인의 애를 먹입니다. 
계속 청해도 들은 채 만 채 당신 갈 길을 가십니다. 
여인은 참으로 무시당하는 기분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까지도 빨리 치유해 주어 돌려보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은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위해 파견되었다고 하시며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안 들어주시면 되지 자신을 쫓아오는 여인을 개 취급까지 하실 필요는 없으셨을 텐데도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 여인의 인내심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자아가 비워진 만큼 그 안에 믿음으로 찹니다. 
아니 오히려 믿음이 자아를 그만큼 밀어내고 죽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대한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그 여인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자랑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 여인은 자신을 완전히 비웠다는 것을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고 말하며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칭찬해 주십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 때 발끈한다면 그 사람은 그만큼 믿음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그만큼 크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크기는 자아의 크기에 반비례합니다. 
자아가 죽을수록 믿음이 완전해집니다. 
온유한 사람일수록 더 큰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아를 죽일 수 없기 때문에 무언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김동덕 씨가 끓어오르는 자아의 불만족을 당나귀를 통해 죽일 수 있었듯,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에 대한 감동으로 자아를 죽여야 합니다.  
 
그렇게 자아를 죽이는 만큼 믿음이 커지고 믿음이 커지는 만큼 주님은 나의 뜻을 따라주십니다.
나의 자아를 죽이는 힘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이십니다. 
이 성령이 나를 감동시켜 다른 것들은 거뜬히 참아낼 수 있게 합니다.  
 
이 성령이 오게 하는 시간을 ‘기도’라고 합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 사랑에 더욱 감동할수록 더욱 주님을 알게 되고 
더욱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매일 주님의 사랑에 감동받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한 번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드님까지도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감동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유일하게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통해 자아를 죽이는 연습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존재의 이유를 찾은 사람이고 하느님 나라와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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