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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8-04 조회수 : 571

8월 4일 [연중 제18주일] 
 
코헬렛 1,2; 2,21-23
콜로새 3,1-5.9-11
루카 12,13-21 
 
< 자녀에 대한 소유욕도 탐욕이다 > 
     
영화 ‘더 보이’(2019)는 부모의 자녀에 대한 탐욕이 얼마나 잔인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줍니다. 잔인한 영화이니 굳이 보시는 것을 추천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 시골에 사는 부부는 아기를 갖기를 소원했지만 임신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하늘에서 작은 우주선이 숲에 떨어집니다. 
그 안에는 아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아내는 그 아기를 꺼내 안고 하늘의 선물이라고 기뻐합니다. 
아내가 좋아하니 남편도 같이 키우기로 결심합니다. 
그가 타고 온 작은 우주선은 헛간 지하에 잘 감추어놓았습니다. 
그가 장차 어떻게 변할지 모른 채 말입니다. 
 
12살 이전까지 아이는 잘 자라주었습니다.
그러나 12살 생일이 되던 해 아이는 돌변합니다.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나쁘게 대합니다. 
그 이유는 12살이 되면서부터 자꾸 헛간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헛간 우주선에서 아이에게 “지구를 빼앗아라!”라는 소리가 들려오고 아이는 그 목소리에 도취되어갑니다. 
 
아이는 우주인이었기 때문에 슈퍼맨처럼 엄청난 힘을 지녔습니다. 
그도 그것을 알게 되고 자신은 지구인이 아니라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게 됩니다. 
결국 어머니는 그 아이를 입양해 온 것이 아니라 우주에서 떨어진 것을 키워주었다고 말해줍니다.  
 
아이는 이제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 해치고 싶은 사람을 해치고 죽이고 싶은 사람은 죽여 버립니다. 
 
아버지가 그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범인이 자신의 아들임을 눈치 챕니다. 
그리고 아이를 죽이려하지만 아이는 이미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까지 죽인 아이는 어머니를 찾아옵니다.
어머니도 자신 때문에 아이가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아이를 죽이려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아이는 제 부모를 죽이고 날아가는 비행기를 자신의 집에 떨어뜨려 그 사고로 부모가 죽은 것으로 위장합니다. 
그리고는 몰래 나쁜 짓들을 해가며 자신의 특별함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영화의 끝입니다. 
 
사람 안에는 무서운 자아가 있습니다. 
누군가 통제해주지 않으면 자아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서 나중엔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사춘기 이전엔 부모가 어느 정도 그 목소리를 끊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은 ‘나는 누구인가?’를 묻기 전까지입니다.  
 
자신의 원천이 부모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 자녀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가?’를 묻기 시작했다면 이미 부모가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때 빨리 자녀가 어디에서 왔는지,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알려주지 않으면 아이는 자아의 목소리에 사로잡혀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자녀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도 부모가 자신을 만들지 않은 것을 아는 이상 자신을 통제해 줄 아무 것도 찾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부모가 끝까지 “너는 내 자녀야!”라며 자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면 자녀로부터 큰 반항의 목소리를 듣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녀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 하는 부모가 겪게 될 미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형보고 유산을 자신에게도 나누어 주라고 말해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에게 돈을 더 많이 가지게 해 주는 분으로 취급당하는 것을 참아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부속물이 아닙니다. 
그분만 있으면 아무 것도 없어도 상관없어야 하는 분입니다. 
그분을 얻기 위해서는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야 하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세상 것을 소유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 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여물주면 밭 갈아주겠지!’라는 식으로 이용하면 하느님을 소처럼 만들어버리는 우상숭배자가 됩니다.  
 
이에 예수님은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탐욕이 있으면 하느님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필요한 도구로 전락해버리십니다. 
 
우상숭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탐욕을 경계해야합니다. 
돈에 대한 탐욕을 경계하기 위해 십일조를 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보이는 것이 자녀에 대한 애정인 것 같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아드님을 성전에 봉헌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자녀들을 참 아버지를 찾게 해 주기 위해 성전에 봉헌할 수 있어야합니다.
봉헌한다는 말은 내 것임을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일곱 아들을 다 잃는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마지막 일곱째 아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이 어머니의 믿음이 결국 아이에게 참 존재의 원천을 알려주는 것이 됩니다. 
그래야만 나중에 자녀들도 고마워합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2마카 7,22-23) 
 
이것이 유태인의 힘입니다. 
나라 없이도 2천 년 동안 세상의 모진 박해를 이겨온 힘입니다.  
 
유태인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들은 부모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왔음을 교육받습니다. 
그러니 부모님께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통제받으며 살아갑니다. 
자아의 소리에 굴복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굴복하려 노력합니다. 
 
부모들은 솔직하게 자녀가 자신이 만든 소유물이 아님을 고백해야합니다. 
그리고 참 부모님이신 하느님께 통제받도록 맡겨 드려야합니다. 
이것이 우상 숭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 부모가 해야 하는 가장 크고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녀가 잘 되게 해 달라고 하느님을 소로 만들어 부려먹는 우상숭배자가 되고, 자녀 또한 자아에 사로잡혀 세상에서 자기만 아는 사람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아이 안에 있는 그 무서운 자아의 이기심을 꺾으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입니다. 
자녀를 위한다면 “너의 참 부모님은 하느님이고 너의 참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시다.” 라고 가르쳐야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참 부모를 찾게 해 준 지상의 부모도 하느님과 자녀로부터 사랑받게 됩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합시다. 
자녀에 대한 지나친 집착도 탐욕이 될 수 있습니다. 
탐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봉헌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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