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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8-03 조회수 : 443

8월 3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레위기 25,1.8-17
마태오 14,1-12 
 
<​ 작은 죄도 짓지 않으려 노력해야 하는 이유 > 
 
영국 성공회는 헨리 8세가 현 왕비와 이혼하고 재혼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생긴 종교입니다.
왕이 재혼을 하고 싶다는데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러나 가톨릭 신자로서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한 번 혼인하면 그 혼인의 유대가 영원히 지속됩니다.
이에 헨리 8세는 가톨릭교회와의 연을 끊고 자신이 교회의 수장이 됩니다. 
모든 전례나 예식은 가톨릭교회의 모습을 따르지만 자신이 교황의 자리에 앉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교의 분열이라는 것이 그의 작은 욕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작은 죄는 더 큰 죄를 짓는 밑거름이 됩니다. 
 
이에 적극 반대하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던 인물이 있습니다.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 성인입니다. 
영국의 대법관까지 역임하고 높은 지위의 정치인이었던 그는 왕의 그러한 행위를 보고 있지 못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멈추지 않고 충언을 하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던 헨리 8세는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마스 모어는 정치인들의 수호성인입니다. 
 
오늘 복음의 토마스 모어와 같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물론 헨리 8세와 같은 인물은 헤로데 왕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죄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영혼은 구원받고 싶어서 믿으려 했던 인물들입니다. 
헤로데 왕도 세례자 요한의 쓴 소리를 즐겨 듣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의 목을 베게 만듭니다. 
죄에 사로잡혀 믿는 하느님은 언제나 우상이 됩니다. 
 
우상숭배는 부처나 알라신 등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숭배는 하느님을 믿지만 자신이 만든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금송아지로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본래 모습이 그들의 죄에 가려진 눈 때문에 변형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오늘 복음의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이렇듯 죄를 지으면 믿고 싶어도 눈이 가려져 우상숭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다 용서해 주신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죄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자아의 판단을 더 믿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선과 악을 분별하라고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하나의 기관입니다. 
그것 자체가 나를 심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건 죄다, 아니다”만을 말해줍니다.  
 
마치 도로의 중앙선과 같습니다. 
넘었는지, 넘지 않았는지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다만 죄책감을 주는 대상이 있는데 바로 ‘자아’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믿느냐, 하느님을 믿느냐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아를 믿었기에 죄책감이 생겨 나무 뒤로 숨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다면 주님께 자비를 청하며 나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아를 믿는 이를 에덴동산에 두실 수 없으십니다. 
자아가 또 다른 하느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느님께서 자비롭다고 믿고 싶어도 계속 죄를 짓는다면 자아에게 더 힘을 실어주는 격이 됩니다.  
 
죄에 자꾸 빠진다면, 자아가 “거봐. 용서해 주면 뭐하니? 또 죄를 짓잖아. 
너는 주님께 합당하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행위 때문에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의 헤로데가 예수님을 정신병자처럼 이상하게 바라본 것처럼, 죄에 빠진 우리들도 각자가 하느님을 금송아지처럼 만들어 우상숭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이 죄책감은 나의 ‘자기 충족적 예언’이 됩니다. 
어차피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한다고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행복은 자신이 정해주는 만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사람들은 아무리 행복이 오는 상황이 되더라도 그 행복을 스스로 차버리게 됩니다. 
돈을 주어도 받지 않고, 용서를 해 주어도 화해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런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고 스스로 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인이 그들을 지나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를 도와주면 더 큰 만족이 온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것을 알더라도 그들이 정해 놓은 행복은 그저 성전에서 봉사하는 가운데 얻는 보람 정도입니다.  
 
죄에서 벗어나야 그에 합당한 행복을 받을 그릇이 마련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면 “이거구나!”라고 외치며 사랑을 실천합니다. 
그 사랑실천을 통해 오는 만족감이 자신이 잘 살아온 상급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살아 “하느님께서 상을 언제 주실까?”라는 마음이어야지 행복이 오는 순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같은 행복을 부어주시지만 준비된 사람만이 그 행복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 준비란 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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