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탈출기 12,37-42
마태오 12,14-21
< ‘이미’ 용서하신 하느님 >
어린 소년 쟈니는 조부모님을 방문하고 선물로 새총을 받았습니다.
그는 새총 쏘는 연습을 하다가 그만 실수로 할머니의 애완 오리를 죽게 했습니다.
그는 두려운 마음이 생겨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오리를 장작더미 속에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보니 여동생 샐리가 자기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샐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할머니는 “샐리야, 설거지하는 것 좀 도와줄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샐리는 “오늘은 쟈니가 부엌일을 도와 드리고 싶다고 했어요. 그렇지 쟈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샐리는 쟈니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습니다.
“오리를 기억하지?”
그래서 쟈니는 설거지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시 후 할아버지께서 낚시하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할머니는 “샐리는 저녁 준비하는 것을 좀 도와 주어야 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샐리는 씩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할머니, 쟈니가 저녁 준비를 돕고 싶다고 했어요.”
또 한 번 샐리는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오리를 기억하지?”
샐리는 할아버지와 낚시하러 갔지만 쟈니는 집에 남아서 저녁 준비를 도왔습니다.
쟈니는 며칠 동안 이런 식으로 샐리의 일까지 힘겹게 하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잘못을 자백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쟈니야, 다 알고 있었단다. 나는 이미 너를 용서했단다.
다만 샐리가 너를 노예로 삼는 것을 네가 얼마나 견디는지 두고 보았을 뿐이야.”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유다 지도자들은 율법을 강조하여 구원받기 매우 어려운 것처럼 만들어버렸습니다.
613개조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자신들과 같은 성인들만이 하느님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습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이것은 마태오 사도가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올바름’으로 번역한 것은 ‘심판(crisis: 판결)’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 특별히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이 잘못 생각하는 ‘심판’에 대해
올바른 시각을 제시해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무자비한 심판이 아니라 아버지의 심판이란 것입니다.
마치 이사악이 야곱을 심판할 때, 야곱이 ‘에사우’라고만 해도 에사우가 받을 상속권을 주는 것처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곧 심판에 관한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오리를 기억하지?”
하느님의 자비를 믿기만 하면 이런 죄책감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이미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아드님께 지우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 죄를 없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지 못하니 계속 아담처럼 뒷걸음을 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도 믿기만 하면 지금 당장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희망을 갖지 못하던 이들이 희망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당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이나 사제들 정도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겼던 관념을 예수님은 뒤집어놓으신 것입니다.
너무나 혁신적인 하느님 자비에 관한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이 기쁜 소식이 너무나 단순하고 쉬워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쉽게 구원을 받는다면 내가 지금까지 율법을 지키느라고 고생한 건 뭐야?’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야 율법을 열심히 지키느라 수고했던 자신들에게 영광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시이 도오기찌라는 범죄자의 이야기입니다.
이시이는 현대 범죄 역사상 유례없는 범죄자로서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살인을 했으며 방해하는 자는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그는 형무소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두 사람의 캐나다 부인이 그를 방문하고 창살을 통해 그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지만
그는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를 포기하고 성경 한 권을 주고 떠났습니다.
이시이는 무심코 그것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읽다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이야기가 있는 곳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이 말씀이 그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읽는 것을 그만 두었다. 마치 5인치나 되는 못으로 꿰뚫린 것처럼 내 마음은 찔렸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믿었다는 것과 그리고 굳어 버렸던 내 마음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이다.”
후에 간수가 이 사나이를 교수대에 데려가려고 왔을 때 그가 그곳에서 본 것은 험상궂은 얼굴이 아니라 미소로 빛나는 환한 얼굴이었습니다.
복음은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는 소식입니다.
이미 우리 죄를 다 용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심판의 진실입니다.
믿기만 하고 다가온다면 주님은 받아주시겠지만, 그것을 믿지 못하여 죄책감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나려 한다면 구원될 수 없습니다.
무자비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무자비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복음은 가장 절망적인 사람이라도 희망할 수 있는 기쁜 소식입니다.
가장 큰 죄인이라도 지금 당장 마음만 바꾸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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