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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1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7-14 조회수 : 512

7월 14일 [연중 제15주일] 
 
신명기 30,10-14
콜로새 1,15-20
루카 10,25-37  
 
<​ 사랑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 
 
한 기계체조 금메달 유망주가 고난이도 기술을 연습하다 턱이 먼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일어서려고 발버둥 쳤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척추 신경조직이 손상된 것입니다.  
 
그는 여덟 살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모국에 대한 그리움을 
열한 살 때부터 배운 기계체조로 극복하고 있었습니다. 
매우 놀라운 속도로 기량이 향상되어 올림픽 금메달을 바라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9개 월 동안 병원에서 겨우 손가락 구부리는 훈련만 받았습니다. 
재활훈련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인생의 꿈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선교사가,
“하느님은 각자의 사람에게 각자에 맞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라고 말을 해 주었고, “이 시련도 그 계획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겨낼 수 없는 시련은 주시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 말을 믿게 되었고 ‘그렇다면, 지금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란 생각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습니다. 
 
“그래, 이 시련은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도우라고 주님께서 주신 메시지야. 
나는 의사가 되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겠어!” 부모님은 그런 몸으로 어떻게 의사가 되겠느냐며 말렸지만, 그의 확신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몇 개만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으로 끊임없이 재활을 병행하며 
그는 다트머스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하버드 의대의 인턴과정도 수석으로 마치고 미국 최고의 존스홉킨스대 병원 재활의학과 
수석 전문의가 됩니다.
당시 미국에 두 명밖에 없었던 하반신 마비 장애인 의사 이승복씨는 자신도 재활을 해야만 하는 처지이면서도 겨우 눈만 깜빡이는 아이에게 이렇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너 내가 휠체어에 있는 것 보이지? 나는 체조 선수였어. 
예전에 한국 대표로 세계에서 뛰었어. 올림픽을 위해 연습하다가 넘어져서 목이 부러졌어. 
그렇다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그러고 싶진 않았어. 
나는 너 같은 사람들을 돕고 싶어. 그래서 내가 네 앞에 있는 거야. 
너도 똑같이 할 수 있어. 하느님과 널 사랑해주는 가족과 많은 사람들이 네 곁에 있고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의사 선생님들이 너를 돕고 있어. 계속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해 나가자. 알았지?” 
 
오늘 복음에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라고 묻습니다. 
율법 교사는 구약의 율법에 매여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쓰여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당연히 그는 십계명의 요약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명료하게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까지는 구약을 거친 유다인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 교사는 사랑을 짐짓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엔 이미 ‘내가 계명을 아니까 그것을 실천하기만 하면 되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왜 굳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스스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구약의 한계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가 자녀들을 낳아놓고 그 자녀들을 주신 주님께 “주님, 제가 어떤 자녀를 사랑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하느님은 무엇이라 대답하실까요? 
선택을 하려는 것은 사랑의 주체가 자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선택’이라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소명’이라는 하느님 중심적 사고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비유말씀을 다 마치시고,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자신이 선택하여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카인이 자신이 동생을 돌보는 사람이냐고 하느님께 대든 것과 같습니다. 
사랑을 자신이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되어 주어라!”라고 하십니다.
되어 주라는 말씀은 하나의 ‘부르심’입니다. 
내가 선택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소명으로 알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배우자도 사랑하라고 주님께서 불러주신 것이고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율법이 이 부르심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지 인간의 힘만으로는 구약의 율법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사제가 되라는 부르심을 따르지 않고 세상에서 사랑하려고 노력했다면 지금처럼 많은 이들을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주님께서 저를 통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오셨고 물고기 잡는 어부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이들을 
사랑의 소명으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닉 부이치치는 팔다리가 없이 태어나 아빠는 아기를 보고 구토를 했고 엄마도 처음 한 번 보고서는 더 이상 볼 용기가 없어 넉 달이 지나서야 다시 아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닉 부이치치도 죽으려고 여러 차례 시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태생소경이 다 이유가 있어 그렇게 태어났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도 이유가 있어 그렇게 태어났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자신의 처지가 소명을 위한 도구로 보였습니다. 
손발이 없는 상태에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로해준다면 더 크게 감동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소명을 알면 모든 것이 그 소명에 맞춰져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 모든 조건을 이용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현재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동기부여 강사입니다. 
 
내 안에 있는 사랑은 하고 싶다는 소명을 넘어서서 주님께서 그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도록 나를 부르셨는지 깨달아야 온전히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 자리만 지키고 있어도 스스로 하려는 것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선 주님께서 나를 왜 창조하셨는지 찾아야하고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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