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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1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7-13 조회수 : 393

7월 13일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창세기 49,29-31.33; 50,15-26ㄱ
마태오 10,24-33 
 
<​ 스승처럼 되려면 > 
   
딘 카멘(Dean Kamen)은 제2의 에디슨이라 불리는 천재발명가입니다. 
그는 열여섯 살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 박물관의 조명 시스템을 다시 디자인해서, 그 박물관 관장의 허락을 받아 설치했습니다.  
 
1970년대에 카멘은 약품 주입 펌프를 발명했고, 이 발명품으로 번 수익으로 전용기와 헬리콥터를 사고 기계실, 전자제품 실험실, 야구장을 갖춘 대저택을 지을 만큼 수익을 올렸습니다.  
 
1980년대에 그는 휴대용 신장투석기를 만들어 대대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90년대에는 계단을 오를 수 있는 휠체어 아이봇을 만들었고, 결국 이것을 계기로 현재 두 바퀴로 수많은 사람들이 도로를 누비고 다니는 세그웨이 (킥보드 형태의 1인용 소형 이륜차)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발명하는 것마다 이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을까요? 
에디슨은 특허가 1,093개나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탁월한 창의적인 발명품의 수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하나의 특허가 나오기까지도 수많은 실패를 거쳐야하는데, 특허를 낸 것 가운데 겨우 몇 개만 성공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공은 그만큼 많은 실패와 비례합니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가 35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600여곡을 작곡했고, 베토벤은 평생 650곡, 바흐는 1,000곡을 작곡했습니다.
그런데 멜로디가 익숙한 곡들은 이런 천재들조차 몇 곡 남기지 못했습니다. 
나머지는 그냥 보통 수준이고 어떤 것들은 매우 낮은 수준의 것들이라고 합니다.  
 
1만 5,000여 곡의 고전음악을 분석한 결과, 5년이라는 일정한 기간 동안 작곡한 작품의 수가 많을수록 음악가가 걸작을 작곡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이는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법칙입니다. 
다작 안에서 몇 개의 걸작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걸작들은 그것을 만든 사람이 실패작이라 여기는 것들도 있습니다.  
 
물론 본인이 보석과 같다고 믿지만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경우는 더 많습니다. 
어쨌든 걸작은 다작의 결과입니다.
딘 카멘은 자신의 연구 팀원들에게 자주 이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수없이 많은 개구리에게 입맞춤을 해봐야, 그 중에 왕자를 하나 찾아낼 수 있다.” 
 
[참조: ‘오리지널스; 2장 눈먼 열정에서 벗어나기’, 애덤 그랜트, 한국경제신문] 
 
     
딘 카멘과 같이 훌륭한 발명가가 되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에디슨이나 딘 카멘이 탄생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의 성공한 것만 바라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처럼 수많은 실패한 것에 따르는 좌절과 모욕과 비웃음을 견디어 낼 용기와 겸손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매번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는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도 육일 만에 인간을 만드시고 칠일 째는 지쳐서 쉬셨는데, 그 인간들도 죄를 지어 세상적인 시각으로는 실패작들이었습니다.  
 
하느님도 첫 아담으로 실패하셔서 두 번째 아담으로 재도전하셨다면, 인간이야 매번 실패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자는 스승처럼 될 수 있고, 종은 주인처럼 될 수 있다는,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라는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유일한 스승이시고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처럼 되시기 위해 하신 것을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처럼 되시기 위해 하신 일은 무엇일까요? 
아버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 때문에 죽임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요한 5,18) 
 
만약 우리가 어떤 이들에게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입니다.”라고 하면, 믿음이 없는 이들은 미쳤다고 할 것이고, 신앙이 있다고 믿는 이들은 교만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 증언은 내 안의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무릅쓰고 당신이 아버지와 같다고 증언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 같다고 증언해야 합니다. 
이것이 스승이요 주인이신 분과 같아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이라 믿고 행동하더라도 결국은 나의 행동이었음이 드러날 때가 많습니다. 
신앙인인데 그것밖에 살지 못하냐고 비웃음을 당할 것입니다. 
하느님 행세한다고 박해도 당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 안의 예수님을 숨기고 살아야할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기도하고 기다리고 100% 확신이 들면 그때서야 말하고 행동해야 할까요? 
그러면 평생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죽게 될 것입니다. 
 
스승처럼 되려면 ‘많은 실패’를 거쳐야합니다. 
그 중에서 다만 몇 번이라도 닮은 행동이 나오면 그것이 역사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비웃음을 받을 각오를 하고 한 번 예수님처럼 말하고 행동해봅시다.  
 
당신을 닮기 위해 수많은 실패를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예수님은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를 바라보는 아빠의 행복한 미소를 보내실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되려면 예수님 수준의 말과 행동이 나오기까지 수천 번 넘어져야합니다. 
아기는 그래서 결국 걷게 됩니다. 
우리도 그렇게 예수님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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