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일 [연중 11주간 목요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코린토 2서 11,1-11
마태오 6,7-15
< 기도가 빈말이 되지 않으려면 >
미국의 화웨이 제재는 엄청 무지막지합니다.
미국 대통령령에 의해 미국 부품과 프로그램의 제공이 중단되자 중국의 화웨이는 현재 존립 자체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 시발점은 아마도 미국에 뿌려진 화웨이의 스마트폰에 숨겨진 프로그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프로그램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의 모든 정보가 중국으로 보내지게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이 군사목적으로 만들어진 미국의 프로그램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그래서 화웨이를 민간 기업이 아니라 중국 정부가 정보를 빼내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국가기업에 가깝다고 보고 있습니다.
화웨이가 지난 10여 년간 유럽과 미국 등 거래 기업들로부터 상당한 양의 각종 기술과 영업 비밀들을 빼냈다고 보고 있습니다.
반면 중국은 외국으로 자신들의 정보가 유출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적극적으로 막고 있습니다.
한국의 카카오톡과 같은 것들을 자국 내에서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정보는 외국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철저하게 규제하면서 자신들의 스마트폰을 쓰는 나라의 정보는 빼내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화웨이 이름 자체가 ‘중화를 위하여’란 뜻으로 중국의 번영을 위한 기업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런 자세로 자신들의 스마트폰을 사 달라고 한다면 누가 사주겠습니까?
그것을 사주면 나의 모든 정보가 그들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할 때 화웨이와 같은 태도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주님께 피해를 주는데도 자신의 청을 들어달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빈말’을 되풀이하는 기도는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라고 하시며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화웨이가 스마트폰을 사 달라고 계속 광고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태도를 바꿔야합니다.
자신이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청하는 모든 것들은 ‘빈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입장에서는 내가 청하는 것이 적어도 당신께 피해가 가지 않도록 규정을 만들어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의 ‘주님의 기도’입니다.
먼저 청하는 이가 당신께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바치는 기도이기에, ‘먼저 아들이 되어서’
무언가 청해야지 적이 되어서 청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러야합니다.
참으로 당연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하늘은 땅과 상반됩니다.
아버지가 하늘에 살면 나도 하늘에 살아야합니다.
나의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심을 안다면 땅의 것들에 집착하여 그것들을 얻고자
기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나의 영광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하는 것을 청해야합니다.
땅의 인간을 하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보답을 다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과연 나의 영광을 위함인지 주님의 영광을 위함인지 살펴야합니다.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일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란 아버지로부터 통치 받는 나라입니다.
나의 주인이 나인지 주님인지 먼저 살펴야합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면 나의 기도는 주님께 내리는 명령입니다.
아버지 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분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주는 만큼 우리 뜻에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주님의 뜻이 우리 양식이 되게 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던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당신 양식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뜻은 묻지도 않으면서 내 뜻만 강요하면 그것이 빈말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내가 이웃을 용서하지도 않은 채 다른 기도를 청한다는 것은, 내가 하느님의 뺨을 때리며 동시에 내 청을 들어달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려면 유혹에 빠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뱀의 소굴로 들어가 뱀에 물리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유혹을 물리치지 않으면서 바치는 기도는 밖에서 부모를 욕되게 하며 집에서 부모에게 이거 달라, 저거 달라 청하는 꼴입니다.
악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마귀이고 사탄입니다.
자신의 욕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악에서 구함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죽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안다면 나를 살게 만드는 청은 들어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악에서 구함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화웨이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청을 드리기 이전에 그분이 원하시는 것에 먼저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주님의 기도에 다 들어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기도를 정성껏 바치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알아서 다 채워주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