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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6-02 조회수 : 532

6월 2일 [주님 승천 대축일] 
 
사도행전 1,1-11
에페소 1,17-23 또는 히브리서 9,24-28; 10,19-23
복음 : 루카 24,46-53 
 
< 주님 승천은 하느님 자비하심의 표징이다 > 

 
시장통을 거쳐 가는 8번 버스엔 늘 승객들이 만원입니다. 
보따리 마다 주고받은 정을 받아 온다고들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를 매달고 있습니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 안에서 갑자기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잠시 후 그치겠지 했던 아이의 울음소리는 세 정거장을 거쳐 올 때 까지도 그칠 기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슬슬 화가 난 승객들은 여기저기서 “아줌마 애기 좀 잘 달래 봐요.” 
“버스 전세 냈나.” “이봐요. 아줌마 내려서 택시 타고 가요! 여러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아~짜증 나, 정말.” 
 
아기를 업은 아줌마에 대한 원성으로 화난 표정들이 버스 안을 가득 매우고 있을 그 때 
차가 멈추어 섭니다.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버스기사만 바라보고 있는데, 기사는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가서는 
무언가를 사들고 다시 버스에 오릅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아이 엄마에게로 다가간 버스기사는 긴 막대사탕의 비닐을 벗겨 애기 입에 물려주니 그제야 아이는 울음을 그칩니다. 
 
다시 버스는 출발을 했고 버스 안에 승객들은 그제야 웃음이 번졌나왔습니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하는 아이 엄마는 버스기사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손등에 다른 한 손” 을 세워 보입니다. 
“고맙습니다.”라는 수화로 고마움을 표현한 아이 엄마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청각 장애인이었습니다. 
 
아이 엄마가 내린 뒤 버스기사는 아주머니와 아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사랑의 불빛을 멀리 비추어 주고 있었어도 누구하나 “빨리 갑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람마다 사람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마치 각자의 액자대로 무언가를 담아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 버스에 탄 승객들과 버스기사는 사람을 바라보는 다른 모양의 액자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각자가 지닌 판단의 틀을 ‘프레임’이라 부르겠습니다. 
프레임(frame)이란 ‘창틀’이란 의미지만 여기서는 관점이나 생각의 틀을 말합니다. 
 
어느 날 친구끼리 미사를 드리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된다고 생각하나?”친구가 대답했습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신부님께 한 번 여쭤보는 게 어떻겠나?” 
 
신부님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신부님,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되나요?”
신부는 정색을 하면서 대답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인데, 절대 그럴 순 없지요.” 
 
친구로부터 신부님의 답을 들은 다른 친구가 말했습니다.
“그건 자네가 질문을 잘못했기 때문이야. 
내가 가서 다시 여쭤 보겠네.” 이번에는 다른 친구가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담배 피우는 중에는 기도를 하면 안 되나요?”
신부는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기도는 때와 장소가 필요 없습니다. 
담배를 피우는 중에도 기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프레임만 바꾸어도 모든 게 달라집니다. 
좋은 프레임을 가진 사람은 같은 사건을 기분 좋게 바라보고 나쁜 프레임을 지닌 사람은 기분 좋은 일에도 기분 나빠합니다.  
 
각자의 프레임에 따라 기분도 정해지는 것입니다.
코넬 대학 심리학 교실에서 재미있는 연구 결과를 내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1992년에 있었던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의 표정을 분석한 것이었습니다.  
 
기쁜 표정을 짓는 선수의 순서는 금, 은, 동이 아니라 금, 동, 은이었습니다. 
분석 팀에서는 그 이유를 프레임 이론으로 풀이했습니다.
금메달을 딴 선수의 표정이 제일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은메달을 딴 선수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금메달을 딸 수 있었는데.’그러면서 금메달의 시각으로 자신의 은메달을 생각한 반면, 동메달을 딴 선수는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의 관점에서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동메달을 딴 선수가 은메달을 딴 선수보다 더 환한 표정을 짓는 것입니다.
은메달이 분명 동메달보다는 더 기쁠 일입니다. 
그러나 금메달에 대한 욕구가 커져 불만족스러운 것입니다.
만약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늘에서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그러면 1, 2, 3 등이 보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면 두 번째로 기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각자의 프레임, 즉 각자가 지닌 액자의 크기는 얼마나 높이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장기나 바둑을 둘 때, 훈수를 두는 사람이 더 잘 보는 이유는 그만큼 멀리 떨어져서 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직접 경기에 들어가면 그 경기에 쏙 빠져들어 시야가 좁아집니다.  
 
많은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현상이나 사람을 한 발 뒤로 물러나서 바라봅니다. 
한 발 뒤로 물러나 바라보면 화가 날 일도 별거 아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나쁜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자신이 너무 낮은 곳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날입니다. 
왜 하늘로 가셨을까요? 
땅에서 멀어지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늘에서 오셔서 하늘로 가심을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죽음도 두렵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부활하여 아버지께로 가실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이 전부인양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칠 때, 
예수님은 죽어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에도 자비로우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못 박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보면 당신이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님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늘로 오를수록 더 자비로운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눈만 오면 나무에 올라가 며칠 동안 내려오지 않는 팬더가 있었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그 팬더가 정상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여우만은 그의 편을 들었습니다. 
여우는 그 팬더가 눈이 내릴 때 새끼들을 위해 먹이를 찾으러 나갔다가 그 발자국 때문에 사냥꾼들에게 새끼들이 잡혀간 일을 알고 있습니다.  
 
어미 팬더에게 눈 위에 찍힌 자신의 발자국은 공포 그 자체인 것입니다.
더 높이 오르면 더 많이 알게 되고 더 많이 아는 만큼 여유롭고 자비로워집니다. 
하느님은 높은 곳에 계시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것들을 다 이해하십니다.  
 
높이 오름은 지식을 확장시키고 이해를 확장시키며 그래서 자비도 커집니다. 
이렇게 생기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따라서 온유한 마음 자체가 곧 하늘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승천의 진리 안에서 복음이 선포될 때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자비롭고 온화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기분 나쁘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시며 승천 때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파견된 제자들이 가르치는 진리는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는 것입니다.  
 
주님 승천만 제대로 묵상해도 누구나 자비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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