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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2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5-27 조회수 : 453

5월 27일 [부활 제6주간 월요일] 
 
독서 : 사도행전 16,11-15
복음 : 요한 15,26-16,4ㄱ  
 
< 내가 하는 말은 따뜻한가? > 

일본 어느 음악학원 광고 내용입니다.
딸이 시집가는 날 아버지가 갑자기 축하곡을 연주하겠다며 피아노 앞으로 나옵니다. 
신랑이 신부에게 아버지가 피아노를 치실 줄 아느냐고 묻습니다. 
신부는 못 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조금 창피한 정도의 실력으로 피아노 연주를 시작합니다. 
딸은 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가 치는 곡은 신부의 죽은 어머니가 어렸을 때 자신에게 자주 쳐 주던 곡이었습니다. 
딸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아버지의 탓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찍 집을 나와 독립해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아내가 치던 곡을 연습해왔던 것입니다.
곡은 중간에서 끊깁니다. 
이제 딸은 눈물을 흘리며 끝까지 쳐 줄 것을 기도합니다. 
아버지는 끝까지 그 곡을 연주합니다.  
 
아버지가 치는 피아노 위에는 아내의 사진이 놓여있습니다. 
딸은 한없는 눈물을 흘립니다. 
따뜻한 언어는 뜨거운 눈물이 솟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언어의 온도’란 책이 있습니다. 
마음에 사랑만 있다면 스킬과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진정성이 스킬과 내용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진정성이 언어의 온도입니다.  
 
말을 할 때, 그 말이 진실한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고, 그 말이 필요한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두 번째, 그리고 그 말이 따듯해야 하는 것이 세 번째 단계입니다.  
 
제가 강의를 하다 보니 말을 할 때, 이 세 단계를 거침을 조금은 알겠습니다.
며칠 전에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본당 신부님이 “삼용아, 수고했어. 나도 말 재미있게 하면 좋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신부님은 성서신학 박사입니다. 강의도 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냥 제가 말을 좀 잘 하는 것 같아서 하신 말씀인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에야 깨닫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말을 재미있게 하는 것은 강의하는 데 2% 정도밖에 영향을 못 줘요.”
그랬더니 그 신부님도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래, 맞아. 내용이 중요하지.”
저는 그냥 웃었습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길어질까 봐 하지 못했습니다. 
 
제 생각엔 말을 재미있게 하는 것이 10이라면 내용은 80이고 나머지는 진정성입니다. 
진정성이 나머지 10인 것입니다. 
진정성이 있으면 일반적으로 내용도 좋습니다. 
진정성이 없으면 아무로 좋은 강의도 A를 맞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진정성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나의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 나의 진정성이 실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기가 막히게 캐치하여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진정성이 없으면 “어, 내용 좋네!”라고만 합니다.


그러나 진정성이 있는 강의는 뭐라 표현하지 못하지만 그냥 “강의 좋더라!”라고 말합니다. 
뭐가 좋은지 물어보면 잘 모릅니다. 
그냥 또 듣고 싶다고 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삼형제와 공주의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중병에 걸린 공주를 살리기 위해 전국에 방을 내렸습니다.  
 
어떤 명의도 고치지 못하자 왕은 공주를 낫게 하는 사람을 사위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대궐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 마을에 각자 하나의 보물을 지닌 삼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큰형이 자신의 보물인 망원경으로 이 포고문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삼형제는 양탄자를 타고 궁궐로 들어갔습니다. 
셋째는 모든 병을 낫게 하는 신기한 사과 하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과를 공주에게 먹이니 공주가 나았습니다.
임금은 셋째와 공주를 혼인시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첫째와 둘째도 공주의 병을 고치는데 일조를 했지만 셋째와 혼인시키는 이유는 셋째는 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소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더 사랑할 때 더 희생하고 더 희생할 때 더 말의 온도가 높아집니다.
기도도 이와 같이 세 단계로 나뉩니다. 
멀리 있는 것을 보는 망원경과 같은 단계인 소리기도를 바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하느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저 말의 유희로 재미있게만 말하려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머리로 기도하는 단계입니다. 
추리기도라 하고 묵상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하느님과 나를 하나로 묶어주는 양탄자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하느님과 합일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안다고 다 행하며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말을 할 때, 내용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단계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단계입니다. 
이를 관상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내어바치는 기도입니다. 이 사람이 하느님과 합일합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진정성을 가지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은 비록 재미가 없을지라도 왠지 끌리고 또 듣고 싶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증언하는 것이 당신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성령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증언해야 할 일이 생길 때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성령께서 다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말을 진정성 있게 만듭니다. 
성령께서 사랑을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참조).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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