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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2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5-26 조회수 : 466

5월 26일 [부활 제6주일] 
 
1 독서 : 사도행전 15,1-2.22-29
2 독서 : 요한 묵시록 21,10-14.22-23
복음 : 요한 14,23ㄴ-29 
 
< 평화로워야 길이 보인다 > 

요즘 이 분 예화만 들어 죄송합니다. 
그 책을 읽고 있기 때문인데 그분의 의견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지만 사례들은 참고할 것이 많아 이번에도 ‘왓칭’의 김상운 저자의 경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자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 
당시 그 반에는 섬뜩한 칼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문제아 중 문제아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있는데도 칼을 이리저리 던지곤 했고 책상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으면 불시에 나타나 손 가까이 칼을 홱 내리꽂았습니다. 
그리고는 기겁을 하는 아이들을 보며 웃었습니다.


김상운 저자는 그 친구 때문에 학교에 가기 싫었고 그 친구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선생님들도 그 아이를 아예 내놓은 자식 취급했고 창문이 깨지던가, 누군가 다쳐 코피를 흘리면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네가 그랬지? 너 말고 그런 짓 할 사람이 누가 있겠니?”


아이는 1학년 때부터 줄곧 그런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이는 왜 칼을 지지고 다녔던 것일까요?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면 아무도 그 아이를 해칠 것 같지 않지만 그 아이는 불안했던 것입니다. 
칼이 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불안한 사람은 항상 자신의 칼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힘으로 평화를 찾으려다가는 그런 참 평화 없는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왜냐하면 뾰족한 침을 지닌 모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이는 대체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할 때 부모가 보호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아이를 자주 때렸습니다. 
그러나 반 아이들은 친구 얼굴에 멍이 들었어도 ‘또 싸우다 그랬겠지.’, 혹은 아예 멍이 든 지도 몰랐습니다.


그가 항상 점심을 싸오지 못했어도 그가 점심을 굶는 것을 눈치 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5학년 담임선생님은 달랐다고 합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망나니 친구가 점심을 거른다는 걸 알고 도시락을 따로 챙겨온 것입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매일 챙겨왔습니다. 
그렇게 6개월쯤 지나자 친구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담임선생님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세 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그가 또 유리창을 깼습니다. 
같은 반 아이들은 벌벌 떨었습니다. 
선생님이 인자하시긴 했지만 잘못에 대해선 몹시 엄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망나니 친구 대신 벌을 뒤집어써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원이 단체기합을 받아야 할 게 뻔했습니다.


그런데 교실에 나타난 선생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렇게만 말했습니다.
“깨진 유리창 빨리 치워.”
그리고는 조용히 망나니 친구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문이 깨졌지?”


이전 선생님들처럼 “또 네가 그랬지?”라고 말하지 않고 단지 ‘문제’만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바라는 게 뭐지?”


친구가 잠시 후 모기만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이 제 아버지였으면 좋겠어요.”


평화는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있을 때 드는 마음입니다. 
아이는 부모로부터 보호를 받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여 스스로 평화를 지키려고 칼을 든 것입니다. 칼이 세상이 주는 평화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으로, 어떤 사람은 명예로, 어떤 사람은 자녀의 출세 등으로 칼을 만들어 평화를 찾으려합니다. 
이 모든 것은 참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입니다.

 

아무리 칼을 들고 다녀도 부모가 보호해주고 있다는 평안함은 누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더 혼자가 되어 더 불안하게 됩니다. 
피를 갈구하며 침을 들고 다니는 모기를 보며 평화로운 삶을 산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란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징표로 남겨놓고 가시는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사랑이 징표입니다. 
사랑이 곧 평화인 것입니다.


위 사례에서는 선생님이 아이에게 준 도시락이 성령님이고 비난하지 않고 손을 잡아준 것이 성령님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령을 주시는 이의 뜻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예수님은 평화를 주시기 때문에 살아야 할 방향도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다. 
평화 없는 사람은 마치 천둥번개가 두려워 머리를 감싸고 구석에 움츠린 사람과 같습니다.
길이 있어도 보지를 못합니다. 
평화가 있어야 주님의 뜻도 따를 수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선생님은 그 망나니 친구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땅바닥이나 종이쪽지에 그림을 끼적거리는 것을 보고 그림에 흥미가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아이들은 미술시간에 선생님이 그 친구에게 “넌 미술에 소질이 있구나.”라고 말하는 걸 자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의 그림실력은 날로 향상되었고 서서히 다른 과목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친구가 남을 괴롭히는 일이 싹 사라진 것입니다. 
5년 내내 아이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칼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더 이상 칼의 도움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길을 찾으면 지팡이만 있으면 됩니다. 
1년 후 졸업식 날, 그 친구는 최우등상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시기 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칼 한 자루, 아니 몇 자루씩을 차고 다녔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평화를 보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전쟁과 싸움과 공포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어 우리가 그런 무기를 들지 않아도 됨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당신 십자가상 죽음을 통하여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평화를 위해 칼을 내려놓아도 됩니다. 
천상 임금의 자녀들이 굳이 무기를 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갈 길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우리들 
어둡고 캄캄한 곳에 갇혀 있던 우리들 
하느님이 어딨냐며 대들던 우리들 
알려고 만했을 뿐 느끼지 못했던 우리들 하느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니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았네.
그 사랑 야훼께 모두 감사드려라
우리에게 베푸신 기적들 모두 찬양하리니
그 사랑 야훼께 모두 감사하여라.
기쁜 노래 부르며 감사하여라.”


‘그 사랑 야훼께 감사하여라.’란 청소년 성가 가사입니다.


오늘은 청소년 주일입니다. 
청소년은 불안합니다. 
주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만 알게 한다면 이런 찬미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온해야 길이 보입니다. 
갈 길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먼저 길을 알려주기보다 먼저 안아주어야 합니다.


칼을 놓아야 펜이든, 붓이든, 뭐든 잡게 됩니다.
불안함에서 벗어나야 길이 보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평화를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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