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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2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5-21 조회수 : 496

5월 21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독서 : 사도행전 14,19-28
복음 : 요한 14,27-31ㄱ 
 
<​ 평화를 주는 법 > 

수원교구 윤민재 신부님의 강의에서 들은 사례입니다. 
 
전교에서 1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딸아이가 어느 날 공부를 하다가 자신의 방에서 소리를 마구 지르더랍니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이었습니다. 
엄마는 딸이 걱정돼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공부 안 해도 괜찮아. 그래도 넌 내 예쁜 딸이야. 공부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그러나 딸은 그 말에 위로를 받지 못했습니다.
자기는 공부를 더 잘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럴 때 어머니가 어떻게 말해주어야 했을까요?
신부님은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딸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알아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공부가 전부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너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니? 그러려면 공부하지 마!” 라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부모는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기를 원하지만 가끔은 이렇듯 오히려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기도 합니다.  
 
“네가 열심히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도리어 “너는 열심히 안 하면 아무 것도 못하는 존재야!”라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이럴 때 “하느님께서 분명 너를 큰일을 위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셨을 거야.” 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위 학생에게는 “공부하는 게 많이 힘들구나. 소리 질러. 괜찮아. 엄마도 공부 엄청 싫어했어.
그래도 잘 참아내는 네가 대견하다.” 라고 말해주어야 했을 것입니다. 
 
한강 다리에서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가족을 생각해 보세요. 부모님이 얼마나 마음아파 하겠어요? 그러면 지옥가요.” 라는 식의 말은 오히려 더 빨리 뛰어내리게 만들 수도 있다고 합니다. 
 
왜 위로해주려고 하는 말인데도 그것이 상대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그런 말들이 상대의 감정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먼저 생각한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이 때문에 내 마음이 평화롭지 못해, ‘쟤는 왜 저래? 자기만 공부하나? 저러다 병나겠네. 어휴. 그냥 자존감이라도 세워주자.’ 라는 식으로 “소리 지를 정도로 스트레스 받는다면 공부 안 해도 돼!” 라고 말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상대에게 좋은 말을 하면 그것이 상대에게 오히려 나의 마음을 왜 아프게 했느냐는 비난이 되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먼저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고 그 평화로운 마음을 상대의 마음과 바꾸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평화롭지 못하면 나를 먼저 평화롭게 하기 위해 상대의 마음보다는 자신 위주의 말을 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평화롭다면 그때야 비로소 상대의 감정을 먼저 느끼고 배려하게 됩니다. 
 
‘왓칭’의 저자 김상운 씨의 지인 중 하나가 맏딸을 먼 지방대학에 보내놓고 갑자기 우울증이 걸렸다고 합니다. 
 
딸과 떨어져 사는 것 때문에 마음이 허전한 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40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슬픔 때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는 딸이 달리기하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딸은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열심히 달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쓰러지셨고 어머니에게 몰려든 군중 속에서 들은 소리는 “누가 어서 신부님 좀 불러주세요.”란 말이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고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매우 엄격한 분이셔서 평소에도 “나는 너희가 우는 걸 원치 않는다. 강인하게 살아야 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장례식장에서도 솟아오르는 눈물을 억눌렀고 40년 동안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그때 김상운 씨가 “울음을 참지 마세요. 지금 맘껏 울어보세요.”라고 말해주었더니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튿날 우울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의사도 우울증 약을 더 이상 먹을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만약 자신의 감정을 먼저 생각했다면 같은 말을 해도 “그냥 울어버리지 왜 참고 있었어요?”라고 비난조의 뉘앙스로 말을 했을 것입니다. 
내용은 같아도 뉘앙스가 다른 것입니다.  
 
내 마음의 평화가 깨지면 그 책임을 상대에게 자신도 모르게 지우게 되어 비난조의 말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상대 때문에 내 감정의 평화가 깨지면 나는 상대에게 평화를 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하십니다. 
“내 평화”를 준다는 말씀은 당신은 평화롭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평화로운 마음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떤 감정을 지니든 예수님은 평화로우십니다. 
그것 때문에 화를 내거나 비난하지 않으십니다.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는 그냥 안아줄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우선 자신의 감정이 옳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왜 그러느냐는 식이나 그러려면 때려치우라는 뉘앙스가 들어있는 말은 그 사람에게 평화를 주지 못합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내 편을 찾습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편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언제나 우리 편이 되어주시겠다는 약속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네가 옳다.”라고 하시며 양 팔을 벌리고 계십니다. 
남에게 평화를 주려면 내가 먼저 평화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평화로운 마음을 상대에게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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