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0일 [부활 제5주간 월요일]
독서 : 사도행전 14,5-18
복음 : 요한 14,21-26
< 은총을 받을 좋은 그릇이란? >
어느 고을에 착하고 예의바른 농부가 살았습니다.
그는 매우 가난했습니다. 농사라곤 손바닥만한 밭뙈기를 부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 밭에 무씨를 뿌렸더니 정말 좋은 무가 났습니다.
착한 농부는 “농사가 잘 된 것은 모두가 원님 덕분”이라며 제일 큰 무 하나를 원님에게 바쳤습니다.
원님도 이렇게 착한 사람이 내 고을에 있는 것을 신통방통해하며 관리를 시켜 선물을 주라고 했습니다.
농부는 큰 황소 한 마리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심술궂은 농부가 이 소문을 들었습니다.
무를 바쳐 황소를 받았다면 자신이 기르는 황소를 바치면 더 큰 선물을 받겠다 싶었습니다.
과연 이 농부는 “저희가 잘 사는 것은 다 원님 덕분입니다.” 라며 기르던 황소를 바쳤습니다.
원님은 이처럼 착한 백성이 많다고 칭찬하며 “창고에 무엇이 있느냐?”고 관리에게 물었습니다.
창고에는 착한 농부가 바친 무가 있었습니다.
원님은 심술궂은 농부에게 그 무를 선물했습니다.
청하는 사람의 마음을 크게 나누면 두 가지입니다.
먼저 꼭 필요해서 쓰려고 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다지 필요하지는 않지만 미래를 대비해 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으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 더 큰 은총을 주실까요?
어떤 사람의 청이 더 간절할까요?
어떤 사람의 청이 더 진실할까요?
만약 모으려고 청하는 줄 알면서도 준다면 그 주는 사람이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청한 것을 받으면 이제 하느님께 덜 의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당신께 의탁하기를 바라십니다.
가진 것이 충분한 사람은 덜 의탁합니다.
그러니 청할 때 모두 소진할 마음으로 청해야합니다.
그래야 주시는 분이 보람 있어 하십니다.
하느님의 선물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이 가진 성령의 에너지를 다 소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이런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겐 사랑이 계속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면 당신의 말을 지킬 것이고 그러면 당신께서 그 사람에게 가서 살 것이기 때문에 당신을 만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만났기 때문에 당신의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이 아니라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보고 만나러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하려고 하는 의지를 먼저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을 원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더 바라는 이에게 먼저 선물을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시종에게 며느리 될 사람을 찾아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시종은 아브라함의 가문에 맞는 사람을 고르기 위해 자신의 낙타 10마리에게 물을 길어주고
자신에게도 주는 여인이라면 하느님께서 점지해 주신 며느릿감이라고 여기겠다고 기도합니다.
레베카란 여인이 그렇게 합니다.
낙타 한 마리가 40리터의 물을 마신다고 하니 한 여인이 하기는 너무도 벅차고 바보 같아 보이는 일인데도 레베카는 목말라하는 낙타와 사람에게 물을 길어줍니다.
사랑의 의지가 없다면 이런 일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다 하고 탈진 상태에 있는 레베카에게 아브라함의 시종은 금은보화와 장신구를 줍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선물이 성령이십니다.
공동 작업시간에도 동료들과 어울리지 않고 기도만 하려고 드는 수녀에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를 그만 하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기도는 성령을 받는 일인데, 그것이 이웃사랑에 소진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행복하려면 성령을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으려면 그 성령을 소진할 줄도 알아야합니다.
모으기만 하는 사람처럼 청하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더라도 내면은 사막처럼 말라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면서도 기쁨과 평화도 함께 잃게 됩니다.
충만히 퍼내어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사람만이
성령께서 주시는 충만한 행복을 누립니다.
기도와 활동의 균형이 맞아야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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