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7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독서 : 사도행전 7,51─8,1ㄱ
복음 : 요한 6,30-35
<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
1966년 어느 날 아침, 미국 중앙정보국(CIA) 최고의 거짓말 탐지 권위자였던 벡스터(Cleve Backster)는 사무실에서 화분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드라세나 식물의 뿌리에서 가장 꼭대기의 잎사귀까지 물이 올라가는 데 얼마나 걸릴까?’
그는 거짓말 탐지장치의 하나인 피부반응 감지기를 잎사귀에 붙여놓았습니다.
그러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물을 주자 감지가 모니터에 즉각 ‘기쁨’의 반응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드라세나 잎사귀가 사람의 감정과 같은 반응을 보이다니 이상한데?’
피부반응 감지기는 지극히 민감한 장치입니다.
혈압, 땀, 맥박의 섬세한 움직임을 감지해 감정의 변화를 읽어냅니다.
누가 거짓말을 한다면 감지기 그래프도 튀어 오릅니다.
스트레스를 받아도 그렇습니다.
백스터는 드라세나 잎사귀에 정신적 충격을 줘보기로 합니다.
‘잎사귀 하나를 떼어내 태워보면 어떨까? 사람처럼 공포감을 느낄까?’
그는 옆 사무실에 가서 성냥을 가져오려고 걸음을 떼다가 ‘혹시?’ 하는 생각으로 감지기 그래프를 바라보았습니다.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감지기 그래프가 마구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엇? 이건 공포 반응 아닌가?’
화초는 ‘공포’의 반응을 그래프에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그래프가 차트의 꼭대기로 치솟았습니다.
성냥개비를 긋기는커녕 그저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말입니다.
성냥을 가져다 잎사귀 밑으로 불을 가까이 가져가보니 공포 반응은 차트 맨 꼭대기까지 치솟았고, 성냥을 다시 옆 사무실로 가져다놓으니 그제야 그래프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믿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한 과학자가 드라세나 실험을 확인해보고 싶어 그의 실험실에 들렀습니다.
역시 잎사귀를 태워버려야겠다는 생각만 했는데도 그래프가 공포 반응을 보이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또 한 번 해 보았더니 또 공포반응을 보였습니다.
그가 네 번째 위협적인 생각을 떠올리자 잎사귀는 공포반응을 멈추었습니다.
드라세나는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의 의도가 진짜로 그럴 것이 아님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양자물리학이 정신세계를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전까지 백스터는 오랫동안 과학계의 조롱거리였습니다.
하지만 프린스턴 대학 교수를 지낸 독일의 생물 물리학자 포프 박사, 상트 페테르부르크 기술대학 물리학 교수인 크리트코프 박사 등이 개발한 최첨단 빛 촬영장치(GDV)를 통해 그의 실험결과는 모두 사실로 확인됐습니다.
[출처: ‘왓칭: 제1부 왓칭, 신이 부리는 요술’, 김상운, 정신세계사]
이 세상 만물을 쪼개고 쪼개면 그것이 인체이건, 밥이건, 뇌이건 하나같이 미립자만 남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미립자가 인간의 의도에 따라 야구공과 같은 알갱이처럼 행동했다가 물결치는 파동으로 변했다가 한다는 사실이 실험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이를 관찰자효과(Observer effect)라고 합니다.
관찰자가 보고 안 보고에 따라 미립자가 다르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의도에 따라 미립자가 반응하고 그 미립자로 구성된 것이 세상이며 식물이고 동물이고 또한 인간인 것입니다.
에모토 마사루 박사가 쓴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에는 물이 사람의 말과 감정에 반응하여 입자가 형성되고 파괴되는 사진이 올라와있습니다.
말하고 행동하지 않아도 입자들은 이미 그 사람의 의도를 읽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어떤 사람을 만나면 이유 없이 불안해지고 어떤 사람을 만나면 이유 없이 편안해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 속에서도 자주 일어납니다.
특별히 아이들은 어른들의 마음을 잘 읽습니다.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물론 동물들도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동물이나 물고기들에게 설교를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행동하기 이전에 이미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사랑과 미움, 두 주파수 중 어느 것이 나를 통해 나오게 만드느냐에 따라 이미 사랑하고 미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체험적으로 사람은 미워지는 것은 저절로 되지만 사랑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는 미워하는 마음이 이미 지니고 태어난 동물의 본성에서 나오기 때문이지만, 사랑은 그 이전 본성을 죽여야만 들어오는 새로운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유리창을 닦아야 햇빛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방 안에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밝혀줄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자신의 방으로 초대하는 것인데, 그 방 안에는 뱀이 있을 수도 있고 빛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사랑은 나를 통해 이웃에게 가는 것인데, 뱀의 독을 내보낼 수도, 혹은 빛을 투과해 보내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기 위해서는 행동으로 무언가 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그 사랑을 투과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아무 행위도 안 하고 봉쇄수도원에서 기도만 하는 이들이 평생 봉사를 한 이들보다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요한 6,32-33)라고 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빵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또한 성령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이시고 성령님도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사랑은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란 뜻입니다.
모세를 통해 빵을 내려주셨듯이, 우리를 통해 하느님께서 사랑을 하시도록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통과시켜주면 됩니다.
그러면 사랑이 내 안에 차고 이웃 사람들은 내 안의 사랑을 느끼고 나의 존재만으로도 저절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면 내가 사랑이 됩니다.
사랑이 되었다면 이미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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