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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2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4-21 조회수 : 471

4월 21일 [부활 대축일] 
 
복음: 요한 20,1-9 
 
< 교회의 믿음 > 

유관순 열사와 함께 투옥되었던 8호실 여성들의 1년 이야기를 다룬 영화 ‘항거’(2019)에서 유관순 역을 고아성씨가 맡았습니다.  
 
유관순은 입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의 고문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음식을 먹이지 않는 것은 고문도 아니었을 정도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죽을 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 없다.” 
 
고아성씨는 유관순 열사의 강렬한 눈빛을 갖기 위해 실제로 닷새 동안 음식을 먹지 않으며 유관순을 자신처럼 느껴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3·1운동 1주년을 맞아 감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는 장면에서는 자신의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 무선 마이크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 달아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매순간 기도하듯 연기한 덕분인지 영화 촬영을 마칠 당시에는 
실제 유관순과 더욱 닮아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위한 자의적 고통을 말합니다. 
부활이 새겨지지 않은 십자가는 헛됩니다.
유관순 열사의 항거도 그랬고 고아성씨의 노력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자의로 받는 고통이라면 반드시 열매를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의 신앙이 없으면 우리의 매일의 삶은 텅 빌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삶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이 고통이 은총이 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모든 믿음이 그렇듯 부활신앙도 혼자 보다는 여럿이, 여럿보다는 더 큰 공동체가 될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믿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힘도 커집니다.  
 
EBS 다큐멘터리 ‘상황의 힘’에서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길에 서서 허공을 바라보면 아무도 그 사람이 보는 곳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둘일 때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세 명이 되자 사람들이 일제히 이 세 명이 바라보는 곳을 바라봅니다. 
물론 숫자가 더 늘어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참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본성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1965년 헝가리인인 라즐로 폴가는 클라라라는 여인에게 선천적 천재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교육에 의해 탄생된다는 믿음을 편지로 씁니다.  
 
클라라도 이에 동의하고 둘은 결혼하여 딸 아이 셋을 낳습니다. 
자녀를 실험도구로 쓰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나름 좋은 의도로 이들을 체스 천재로 만들려는 계획을 짭니다.  
 
공부는 집에서 하게하고 집 안의 모든 환경을 체스를 배우기 좋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장녀 수전은 네 살 때 체스를 시작하여 6개월 만에 성인을 이깁니다. 
둘째 소피아는 수전보다 나았는데, 열네 살에 체스 세계챔피언이 됩니다. 
막내 유디트는 셋 중 최고였는데 다섯 살 무렵 아빠를 이겼고, 열두 살에는 최연소로 세계 100대 기사에 뽑힙니다. 
그리고 열다섯 살 4개월 때 역사상 최연소 그랜드마스터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신들의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체스를 두어야 했던 것이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을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체스를 두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언젠가 둘째 소피아가 한밤중에 목욕탕에서 계속 체스를 두는 모습을 아버지 라즐로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소피아, 이제 체스 말들을 좀 놔주렴.”이라고 하며 그만 자러 가라고 딸을 달랬습니다. 
그러자 소피아가 대답했습니다.  
 
“아빠, 전 놔주고 싶은데 이 친구들이 날 놔주지 않아요!”
이 모든 것은 라즐로 폴가라는 한 인물의 믿음에 의해 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여인이 그 믿음에 동조하였고 그들의 자녀들이 그 부모의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그 믿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 갈수록 더 실력이 향상되었던 것은 첫째보다는 둘째가, 둘째보다는 셋째가 더 큰 공동체에서 발휘되는 더 확장된 믿음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는 부모의 믿음만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둘째, 셋째는 형제들의 믿음까지 도움으로 받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 부활에 대한 믿음이 몇몇의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특별히 사도들에 의해 주도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새벽에 하셨지만 사도들에게는 거의 맨 마지막에 밤에 나타나십니다. 
사도들은 낮 동안 예수님을 본 많은 이들의 증언만 들어야했습니다.  
 
이는 부활신앙이 성직자들의 신앙이 아닌 교회의 신앙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본당의 신앙은 본당 신부님이나 수녀님의 신앙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들의 신앙이 모아진 신앙입니다.  
 
분명 신부님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 본당만의 신앙 정도에 따라 그 본당에서 세례를 받는 이의 믿음의 정도가 결정됩니다. 
그들이 가까이 접하고 배우는 것은 바로 옆에 있는 신앙인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소속되고 싶은 본능은 너무나도 강력하기에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환경과 믿음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땅콩을 쪼개는 더 높은 기술을 습득한 침팬지 무리에 있던 침팬지가 그보다 열등한 기술을 가진 무리에 속하려고 자신이 가진 높은 기술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1950년대 심리학자 솔로몬 애시의 실험으로 인간에게도 적용됨이 증명되었습니다.
아주 간단한 문제도 온 공동체가 다 틀리게 대답하면 자신도 뻔히 아는 답을 틀리게 대답한다는 것입니다. 
답을 맞히는 것보다 무리에 속하고 싶은 욕구가 더 큰 것입니다.  
 
따라서 그 무리의 수가 많을수록, 그 무리의 믿음이 확고할수록 그 속에 속한 이의 믿음이 확고해집니다.
예수님도 신앙이 성직자만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이들의 신앙을 통해 세상에 전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교회의 신앙은 바로 우리 각자들의 신앙의 총합입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 모여 하나의 신앙을 형성하고 그 안에 들어오는 이들이 그 신앙에 물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당시 인정을 받지 못하는 부류의 여성들에게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당신 사도들이 공동체의 믿음을 존중하도록 가르치기 위함이었고 모든 이들이 어디서나 같은 수준의 믿음을 만나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작은 본당 공동체에 속해있더라도, 굳이 바티칸에 가서 교황님으로부터 믿음을 전수받으려 하지 않아도 교회의 믿음을 어디서나 전수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이 강해지면 교회의 믿음도 강해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믿음은 성당에서 만날 수 있는 한 할머니의 믿음입니다. 
나의 작은 부활체험들이 모여 교회의 믿음을 형성하고 그것이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탄생을 위한 선교의 힘이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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