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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2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4-20 조회수 : 371

4월 20일  [파스카 성야] 
 
복음: 루카 24.1-12 
 
< 부활이 있는 죽음, 부활이 없는 죽음 > 

세상에는 수많은 죽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죽음이 다 부활을 맞지는 않습니다.  
 
가리옷 유다의 죽음은 부활이 없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이 있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한 건물의 입구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얼굴에 주름이 많고 옷차림도 허름했습니다. 
그러나 밝은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한번은 건물의 주인이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시나 보지요. 표정이 항상 밝아 보여요.”
그러자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제 걱정을 트럭에 담으면 아마 100대 분량도 더 될 것입니다.”
부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런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습니까? 무슨 특별한 비결이 있나요?”
할머니는 부자에게 행복한 삶의 비결을 들려주었습니다. 
 
“내게 특별한 비결이 하나 있어요. 
저는 고통이 닥치면 예수님께서 무덤에 머물러 계셨던 사흘을 생각하면서 사흘 동안 기다립니다. 
사흘 뒤에는 어김없이 새로운 해가 뜬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죽음을 감내하는 힘입니다.
사흘만 참으면 거의 모든 근심이 사라질 것이라는 믿음이 부활신앙입니다.  
 
어쩔 수 없이 사흘을 참는 것과 사흘 후면 반드시 변하게 될 것이라 믿어 참게 되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고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은 27년간의 수감생활을 하고 나올 때가 72세였습니다.
그런데도 젊은 사람 못지않은 건강함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진 박해 속에서도 이 고난의 시간 뒤에 반드시 부활이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의 팔순이 다 되어 남아공의 첫 유색인종 대통령이 되었고 내전 분위기가 있었던 나라를 안정시켰습니다. 
이런 삶이 부활신앙으로 사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이 있다고 믿으면 모든 고난이 의미 있게 되고 실제로 부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맞아야 하는 고통과 죽음은 부활이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당해야 하는 작은 죽음들과 희생들에 반드시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미시켜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뒤에는 반드시 부활이 있음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이전에 수차례나 당신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했어도 예수님은 확신하셨습니다. 
즉, 부활을 믿는 죽음이 부활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는 기도가 부활신앙에 따른 죽음입니다. 
기도를 위해서도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합니다. 
기도하고 나면 성령의 은혜가 충만할 것을 믿기 때문에 또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는 죽음인 것입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은총이 주어질 것을 믿고 내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고 죽는 것은 부활을 맞을 수 없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죽음은 반드시 부활을 맞게 됩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향해 항해할 때에 선원들은 모두 그를 죽이려고 했다고 합니다.
자신들을 죽게 만드는 선장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콜럼버스의 말을 믿지 못하고 절망으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자신의 항해가 고통의 연속이지만 언젠가는 부활의 영광이 있다고 믿어 전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만이 참 부활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다고 믿는다고 다 부활을 맞는 것만은 아닙니다. 
가미가제 자살 특공대나 빈 라덴에게 속아 수많은 인명피해를 입힌 테러단원들도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알라신에게 받을 상이 크다고 믿고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행위는 사랑의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사랑만이 생명력이 있습니다. 
사랑 없이 새로 태어나는 생명체는 없습니다.  
 
따라서 부활을 위한 죽음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죽음이어야지 생명을 죽이는 죽음이어서는 안 됩니다.  
 
부활 자체가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사랑이 아닌 곳에서 솟아나는 부활은 없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죽음이 아니라면 부활을 믿어도 부활하지 않습니다. 
 
구소련에 속해 있던 아르메니아에서 무려 5만 5000명이 참사를 당한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9층 아파트가 무너지면서 스잔나라는 엄마와 네 살 난 딸 가이아니가 철근과 콘크리트 틈새 속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갇혀 있었는데 가이아니는 엄마 옆에 누워서 “엄마, 목말라”라는 한 마디 말을 계속 토해냈습니다.
움직일 수도 없었던 엄마는 딸의 목을 축일 방법을 고민하다 조난당한 사람들이 먹을 것, 마실 것이 없을 때 피를 나눠 마시던 TV 장면을 기억해냈습니다.  
 
어둠 속에서 엄마는 손을 더듬어 깨어진 유리조각을 하나 찾았고, 지체 없이 손가락을 찢어 흐르는 피를 딸의 입술에 축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두 주일이 지났고 그들은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엄마는 딸에게 피를 주었기 때문에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부활을 위한 죽음은 반드시 생명을 위한 죽음이어야합니다. 
부활을 시켜주시는 분이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은 부활을 믿더라도 부활할 수 없습니다. 
 
부활을 위한 죽음이란 첫째, 부활을 믿는 죽음이어야 하고, 둘째 생명을 위한 죽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죽음으로 교회가 탄생할 것임을 아셨고 또 당신은 반드시 부활할 것임을 믿으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수많은 죽음과 부활로 엮여집니다.
생명을 살리는 죽음, 생명을 낳는 죽음은 반드시 부활이 뒤따름을 의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부활을 믿고 생명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할 때 매일이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나날이 될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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