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7일 [성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오 26,14-25
< 나를 기분 좋게 하는 말인가,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말인가? >
카네기가 뉴욕의 록펠러 센터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을 때의 일입니다.
다른 친구 한 명과 빌딩 안으로 들어서서 안내원에게 헨리 수벳이라는 사람의 사무실 호수를 물었습니다.
단정한 제복 차림의 안내원은 서류를 검토하더니 깍듯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헨리 수벳...18층 ....1816호실입니다.”
안내원은 말 사이에 간격을 두고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카네기는 서둘러 승강기 쪽으로 가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다시 안내원에게로 뛰어갔습니다.
“지금 당신이 말하는 방법은 정말 현명한 것 같군요.
명료하고 정확한 그 발음은 누구도 흉내 내기 힘들 것 같습니다.” 순간 안내원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 차올랐습니다.
“고맙습니다. 안내하는 이 일을 하다 보니 정확한 의사 전달을 위해선 무엇보다 발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름대로 또박또박 말하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안내원의 설명을 귀담아 들은 카네기는 가볍게 목례를 해 보이고 승강기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이리저리 따라다닌 친구가 투정하듯 말했습니다.
“자네는 이 바쁜 시간에 그깟 일 때문에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는가?” 카네기는 어깨를 으쓱 들어 보이며 대답했습니다.
“칭찬은 내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네. 그렇지만 그 효과는 실로 대단하지.
저 안내원은 내 칭찬을 듣고 아마 가슴이 부풀만큼 행복했을 것이네.
그것을 아는 나는 내 입에서 칭찬이 나오는 순간 인류의 행복의 총량을 조금 더 증가시켰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곤 하지.”
승강기 문이 열리고 카네기가 앞서 내렸습니다.
친구는 중얼거리며 카네기를 뒤따랐습니다.
“인류 행복의 증가라고?”
카네기는 남을 행복하게 하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말을 합니다.
저도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조심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 말에 대해 후회되는 적이 많습니다.
후회되는 대부분의 말들은 내 자신을 들어 높이는 말이거나 타인을 낮추는 말들입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행복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또 자주 그런 말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이 타인이 듣기에 좋도록 겸손하고 따듯한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면 참 부럽습니다.
그런 말들을 잠깐은 흉내 낼 수 있지만 항상 그런 말을 하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말의 따듯함은 마음의 따듯함에서 전달됩니다.
말보다는 마음을 먼저 고쳐야 할 것입니다.
나를 먼저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타인을 기분 좋게 해 주는 말은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리옷 유다가 당신을 배신할 것임을 암시하시며,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왜 ‘당신과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라고 하셨을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한 번 상상은 해 볼 수 있겠습니다.
빵을 적시는 대접은 소스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소스 대접이 그리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빵을 찍을 때 아무래도 불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랫사람과 윗사람이 함께 손을 뻗었다면 보통은 아랫사람은 조금 기다렸다가 윗사람이 빵을 적시고 나서 빵을 적실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아마도 그것을 기다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스승과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신다는 것은 유다가 육체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임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유다가 돈을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돈을 준 높은 양반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받자마자 예수님을 팔아넘길 궁리를 하였습니다.
은돈 서른 잎은 한화로 약 천만 원 정도 됩니다.
예수님의 몸값이 그분의 사랑받는 제자에게는 천만 원으로 넉넉했던 것입니다.
유다는 스승조차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타인이 아니라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타인을 기분 좋게 하는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라고 하십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너는 너에게만 관심 있구나!”라고 하시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에게 관심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으로 말합니다.
그러니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글에서 읽으니 말을 할 때 세 개의 문을 통과하라고 합니다.
첫째 문은 그 말이 진실한가?
둘째 문은 그 말이 꼭 필요한 말인가?
마지막 셋째 문은 그 말이 따듯한가?
내가 하는 말이 하느님의 말이라면 따듯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리옷 유다의 말은 진실하지도 않았고 필요하지도 않았고 물론 따듯하지도 않았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말씀은 진실했고 필요했으며 유다의 잘못을 덮어주는 따듯한 말씀이셨습니다.
우리가 말할 때 우리 자신의 마음상태가 드러납니다.
사랑이 있으면 사랑의 말을 하고 사랑이 없으면 자신을 위한 말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이 내 기분을 좋게 하는 말인지, 이웃을 위한 말인지 돌아보아야합니다.
말이 이기적이면 마음은 훨씬 더 이기적일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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