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성주간 화요일]
독서 : 이사야 49,1-6
복음: 요한 13,21ㄴ-33.36-38
< 힘이 들 때 꼭 누군가와 나누십시오 >
사막 마라톤이란 것이 있다고 합니다.
자신과 싸우며 밤낮으로 사막을 달리는 경기입니다.
사막을 달릴 때 가끔 사람이 죽기도 한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이유는 수분부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쓰러져있는 사람을 보면 수통에 아직 물이 충분한 것입니다.
사람이 물이 없어 죽는 것이 아니라 물을 마실 시간을 갖지 못해 죽는 것입니다.
목표에 빨리 도달하려는 마음 때문에 물 마시는 것도 잊고 달립니다.
그러나 워낙 사막이 건조하다보니 수분이 빨리 빠지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쓰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몇 걸음을 걸었는지 측정하는 기계를 차고 몇 보 정도 뛰었으면 목이 마르지 않아도 반드시 수분보충을 해 준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규칙적으로 물을 마시는 시간을 가져야합니다.
정신없이 달리다보면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그리고 큰 병이 걸리거나 우울증이 심해져 자살충동을 느낄 때까지도 자신을 방치합니다.
사막을 달리며 수분이 부족해지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과 마음을 정비하기 위한 시간을 갖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쓰러져 죽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마음이 산란하셨다고 합니다.
이는 자아의 뜻과 하느님의 뜻이 싸울 때의 혼돈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면 안 되는 줄을 알면서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마음이 산란해집니다.
예수님도 유혹 때문에 산란하셨습니다.
산란한 마음을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입니다.
하느님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로 이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그렇지만 최후의 만찬 때도 무언가 하셨습니다.
바로 당신을 배신할 사람을 노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당신 자신을 이해할 제자가 한 명이라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끝까지 유다에 대한 비밀을 숨기려고 하셨다면 요한까지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위로를 드릴 제자는 한 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가리옷 유다가 당신을 팔아넘길 사람인지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에 당신을 이해해 줄 사람이 한 사람 늘어나게 되었고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갈 때 요한은 예수님을 따라 골고타 언덕까지 올라갔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위로가 필요하셨습니다.
물론 누구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은 분명 사랑에 위배되는 행위입니다.
노아가 술을 마시고 알몸으로 누워있을 때 그것을 덮어주는 아들들은 축복을 받았지만 그것을 들추어낸 이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아들이 함이고 가나안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함이 아버지의 치부를 들추어 낼 때는 마음이 산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을 들어 높이기 위해 아버지까지도 웃음거리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들어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당신에게 해가 되는 악이 무엇인지 드러내신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그리고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기에 유다를 놓아주신 것입니다.
만약 사막을 달리던 가운데 자신이 쓰러졌을 때 재빨리 물을 마시게 해 줄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그 사람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옆에 사람이 없더라도 그냥 물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갈증이 해소될 수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누군가에게 그 유혹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객관화할 수 있고 타인의 도움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어디로 갈지 몰라 쩔쩔매면서 자존심이 있어 아무에게도 물어보지 않고 차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는 것은 현명한 행위가 아닙니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밝혀야 도와줄 사람이 생깁니다.
예수님도 마음이 산란하실 때가 있으셨습니다.
하물며 우리야 얼마나 이 영적인 싸움이 어렵겠습니까?
마치 자신은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을 찾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그 자존심 때문에 영영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그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사는 것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셨지만 사람들의 이해를 바라셨습니다.
말할 사람이 없거든 적어도 고해성사 때 말해야합니다.
규칙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는 것은 규칙적으로 물을 마셔주는 것과 같습니다.
고해성사를 보면 하느님이 이해해주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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