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4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
이사야서 50,4-7
필리피 2,6-11
복음: 루카 23,1-49
< 흐르게 하러 오신 예수님 >
어느 날 부처님이 제자와 함께 길을 걷다가 길에 떨어져 있는 종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제자를 시켜 그 종이를 주워오도록 한 다음 “그것은 어떤 종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향을 쌌던 종이입니다. 남아 있는 향기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제자의 말을 들은 부처님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를 걸어가자 이번엔 길가에 새끼줄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부처님은 제자를 시켜 새끼줄을 주워 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전과 같이 “그것은 어떤 새끼줄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가 다시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생선을 묶었던 줄입니다. 비린내가 아직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도 이와 같이 원래는 깨끗하였지만 살면서 만나는 인연에 따라 죄와 복을 부르는 것이다.
어진 이를 가까이 하면 곧 도덕과 의리가 높아가지만, 어리석은 이를 친구로 하면 곧 재앙과 죄가 찾아 들게 마련이다.
종이는 향을 가까이해서 향기가 나는 것이고, 새끼줄은 생선을 만나 비린내가 나는 것이다.
사람도 이처럼 자기가 만나는 사람에 의해 물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있나요?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향기를 간직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로부터 나는 향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또 나에게 오게 되어있습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중간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수준이 곧 나의 수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수준을 높여주러 오셨습니다.
좋은 향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나귀와 같은 존재입니다.
나귀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만 천상천하의 왕께서 타고 다니시기는 좀 겸손한 동물입니다.
그러나 겸손하신 왕께서 그 위에 타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자신의 발밑에 겉옷을 깔았습니다.
나귀는 주님을 만날 수 있었기에 주님을 맞아들이려는 사람들과의 중간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향기를 내게 되니 사람들의 겉옷을 밟으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합니다.
사고가 나서 머리에 피가 고였을 때 그 피를 빼어주지 않으면 상당히 위험하다고 합니다.
오히려 피를 흘리는 것이 그 피가 머릿속에서 응고되는 것보다 낫습니다.
피는 흘러야합니다.
그리고 피가 흐르기 위해서는 어떤 곳이 찢어져야합니다.
우리는 처음에 우리 것을 흘려주지 않으려고 찢어져야 할 곳을 막았습니다.
그래야 더 부자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피는 많아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흘러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막힌 혈을 뚫으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성전은 그 뚫린 곳으로 흐르는 피 때문에 살게 됩니다.
피는 흘러야하고 그 흐르는 심장의 역할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한국전쟁 때 한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얼어 죽었습니다.
아기는 살았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미군에 의해 발견되어 미국에서 자란 이 아이는 청년이 되어 어머니 산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겉옷을 벗어 어머니 산소를 덮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그때 얼마나 추우셨어요.”
어머니의 옷 벗음이 청년을 옷 벗게 했습니다.
누군가의 피 흘림이 나를 피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피 흘릴 수 있을 때 모기에서 예수로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
모기는 관계를 맺을 수 없지만 예수는 처음 만난 사람과도 가족을 만들 수 있습니다.
자신의 것을 내어줄 줄 알기 때문입니다.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내어줄 줄도 모릅니다.
이렇게 새로 태어나게 만들기 위해 예수님께서 먼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께서 나귀 위에 타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려면 혼자 있는 시간을 잘 활용해야합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요?
빨리 불쌍한 이웃들을 만나 사랑을 전해야할까요?
아닙니다.
우선 나의 수준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수준을 끌어올리면 그 수준에 맞는 사람들도 나의 향기를 맡고 나에게 오게 되어있습니다.
우선 그분으로 내가 흘러야합니다.
오늘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는 날입니다.
그분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은 팔마가지를 흔들었고 자신의 겉옷을 그분이 오시는 길에 깔았습니다.
겉옷은 당시 매우 귀중한 물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흐르게 하신 것입니다.
누군가와 만나려면 반드시 내 것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향을 싼 종이는 향내를 내고 생선을 묶었던 새끼줄은 생선비린내를 풍깁니다.
이 냄새 때문에 모여드는 사람이 다를 수 있습니다.
향내를 좋아하는 사람이 종이로 모여오고 생선을 좋아하는 고양이는 새끼줄 쪽으로 모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같은 향을 풍기며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성령을 흘려보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에제키엘 47장에 보면 성전 오른편에서 물이 흘러내리는데 그 물이 가는 곳마다
죽었던 땅이 살아난다는 예언이 나옵니다.
그 성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분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피와 물이 우리 메마른 땅에 들어와 우리를 다시 생명의 땅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해처럼 꽉 막혀있던 우리도 이젠 갈릴래아 호수처럼 오른쪽 옆구리가 터지며 우리 물을 이웃에게 뿌리게 됩니다.
그러면 이웃이 우리가 뿌리는 물로 살아납니다.
그러면 그들도 흐르게 됩니다.
내 겉옷을 벗어 그분께서 들어오실 길 위에 깝시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면 생명의 물이 흘러내리는 성전이 됩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 다른 이들도 뚫리게 되어 성령이 흐르는 성전을 친구로 가지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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