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3일 [제5주간 토요일]
에제키엘 37,21ㄴ-28
복음: 요한 11,45-56
< 감정에 솔직해야 하는 이유 >
‘레온 페스팅거’란 학자는 1950년대 초에 신문에서 이상한 기사를 보게 됩니다.
어느 사이비 교주가 조만간 큰 홍수가 일어날 것이란 예언을 하고 오로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만 비행접시가 나타나 구원해준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를 믿은 사람들은 전재산을 교주에게 맡기고 철야기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날이 왔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기는커녕 날씨만 화창하였습니다.
교주는 다시 신도들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세상을 구했습니다!”
교인들은 더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더 열심히 교주를 믿었습니다.
교주는 누가 봐도 사기꾼입니다.
그런데 한두 명도 아니고 수천수만 명이 교주를 믿을 수 있을까요?
페스팅거 교수는 이런 상황을 ‘인지 부조화’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인지 부조화란 자신에게 일어나는 불편한 감정을 달래기 위해 생각과 행동으로 평화를 찾아보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기합리화는 진정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진정한 자신과는 다른 새로운 자신을 만들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솝우화에서 여우가 맛있게 보이는 포도송이를 보고 먹고 싶어 여러 번 시도를 해 보다 손이 닿지 않자 ‘저 포도는 분명히 신포도일거야!’라고 생각하고 가버렸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렇게 불만족한 자신의 마음을 자기합리화로 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자기합리화를 통해 사이비종교도 믿게 되고 심지어 살인도 하게 됩니다.
여우는 그 포도를 먹지 못해 안타깝고 화가 나는 자신의 감정을 바라보았어야 합니다.
오늘 유다인들이 모여 이런 행동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마음 적으로는 예수님을 죽일 결정을 내렸습니다.
마음에서 올라오는 질투와 시기심, 화 등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 감정을 덮어버리기 위해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받드는 것처럼 보이면 로마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란 이유를 찾아냅니다.
대사제 카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대사제로서 예언을 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핑계들은 다 맞습니다.
그래서 감정을 속일 수 있는 것입니다.
감정을 속이면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당당할 수도 있습니다.
감정 – 생각 – 말, 이 셋 중 가장 솔직한 것이 무엇일까요?
가장 깊숙한 마음에서 올라오는 감정일 것입니다.
생각은 머리로 하고 말은 입으로 합니다.
인간은 ‘심장 – 머리 – 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인간에게서 심장이 가장 깊은 부분입니다.
그러니 가장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정이 나의 모습과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이 감정이 생각을 거치면 퇴색되고 말과 행동으로 나오면 전혀 다르게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말과 행동, 혹은 생각만 바라보면
나를 아주 딴 사람으로 인식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은 속일 수 없습니다.
가장 솔직한 것은 마음입니다.
나의 시선을 말이나 생각에 두기보다는 내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 욕구에 집중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솔직할 수 있고 자기 합리화에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감정에 솔직하라는 말은 나의 감정을 내가 보란 말입니다.
감정대로 하다가는 인간관계가 다 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당히 표현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게 정직한 나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나는 표현되는 내가 아니라 그런 감정이 일게 만드는 나입니다.
솔직해지라는 말은 그 감정을 나라고 여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유다인들의 감정은 질투였습니다.
질투하는 자신들을 생각과 말로 숨겼습니다.
그리고 애국자가 되어 하느님까지 살해하게 됩니다.
질투가 일어나는데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 지경까지 간 것입니다.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내가 참 내가 아닐 수 있습니다.
진짜 나는 나의 마음에서 올라오는 감정으로 알 수 있습니다.
감정에 솔직해지십시오.
그래야 발전할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